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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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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장국 청진옥.jpg

청진동에는 ‘한때’ 선지해장국집이 있었다. 유치원부터 국민학교(초등학교)를 다니는 내내 그 앞을 오갔다. 어른을 따라 국물을 떠마시며 해장국 입맛에 길이 들었다. 머리가 큰 다음에는 혼자서도 안으로 들어갔다. 선지와 소양을 넣은 해장국은 해장과는 아무 상관없이도 수시로 발길을 이끌었다.


대학생 시절 어느 여름 동해안 작은 어항에서 해장국을 앞에 놓고 난감했다. 밤새 완행열차에서 부어댄 숙취를 간절하게 풀고 싶었다. 하지만 눈 앞에 놓인 해장국은 해장국이 아니었다. 생선을 넣고 얼큰하게 끓인 그것은 그냥 매운탕이었다. 지금이야 그리운 동해의 걸작이지만 청진동 해장국만 알던 어린 대학생에게는 참으로 낯선 해장국이었다.
 

직장생활을 하며 다시 청진동 해장국과 우애를 쌓았다. 깊은 새벽 신문을 최종 마감하고 고요한 골목길을 찾아 선지해장국과 맞닥뜨리면 친숙하고 편안했다. 그 시간이면 다른 신문사 야근팀들도 청진동 해장국집으로 몰려들었다. 선배들은 청진동 해장국집의 옥호들을 비교하며 나름 아는체를 했다. 하지만 뚝배기 선지해장국과는 이미 알고 지낸 지 오랜 사이였다.
 

이제 청진동과 선지해장국은 흘러간 과거의 연인일 뿐이다. 추억은 아련하지만  그리운 광경은 마음으로만 볼 수 있다. 해장국집은 근처 무교동에 들어선 빌딩 일층에서 새터를 잡고 열심히 명맥을 이어가는 중이다.
 

큰딸이 서울의 주한미국대사관에서 외교관으로 일하던 때 선지해장국 소식을 전해 온 적이 있다. 고향 방문길에 청진동 해장국은 빠뜨릴 수 없는 노포의 맛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딸은 아빠의 손을 잡고 어릴 때부터 해장국 맛을 배웠던 터였다. 어느날 딸은 점심 시간 홀로 해장국집을 찾아 아빠에게 카톡을 보냈다. “아빠와 함께 가던 해장국집에 왔어요. 아빠가 보고 싶어요.”
 

딸은 광화문에 위치한 주한미국대사관에서 나와 종로구청 앞을 건너 무교동 쪽 길을 걸어 해장국 집에 다달았을 것이다. 아빠가 다닌 초등학교는 구청이 됐고 유치원 자리에는 빌딩이 들어섰다. 딸의 카톡을 보며 눈앞에서 선지해장국의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아빠와 딸은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해장국으로 다시 핏줄을 확인했다. 청진동은 천지가 개벽했지만 해장국은 대를 이어 흘러가는 중이다.
 

대전 역앞 역전시장에서 선지해장국 한 그릇을 1,000원에 파는 노인이 있다. 언뜻 믿기지 않지만 사실이다. 천원 짜리 선지국이 오죽하겠는가? 당연히 의심이 먼저 가지만 해장국은 아주 푸짐하다.
 

한국에 사는 미국사람 오스틴 기븐은 유튜브 방송 ‘Eating what is given’을 운영하고 있다. 자기 이름 ‘Given’을 슬쩍 삽입한 채널 이름은 ‘주는 대로 먹어야’라고 번역할 수 있을까. 전국 곳곳의 맛집을 찾아 생생한 동영상을 올린다. 맛집이라고 대단한 식당이 아니라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업소들이 많이 소개된다.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인기 채널이다.
 

오스틴 본인도 천원 짜리 선지해장국이 아주 맛있다는 제보를 듣고 식당을 찾아가면서 계속 의구심을 보인다. 신기해서 가보기는 하는데 믿기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다 할아버지가 퍼준 선지국을 맛보면서 오스틴은 감탄한다.
 

“바보같이 들리겠지만, 내 맛집 리스트에 추가해야겠어요.””돈을 더내야겠어요. 그래야 마음이 편할 것같네요.” “제 머리로는 계산이 안되요.””제값을 다 받는다고 해도 또 올거에요. 아주 맛있어요.” “솔직히 다른 사람들이 알까 걱정이 되네요. 너무 많이 올까봐요.” “10점 만점에 10점입니다.”
 

할아버지의 식당에서 1,000원이 넘는 메뉴도 있다. 돼지국밥 2,000원 그리고 콩국수가 2,000원이다. 식당은 홍성수 할아버지(81세)와 이정순 할머니(79세)가 꾸려가고 있다. 처음 식당을 시작할 때는 350원을 받다 1994년부터 1,000원을 받고 있다.
 

주재료인 우거지 채소는 시장 가게들의 ‘기부’로 조달한다. 하루 150명에서 200명 정도의 손님이 찾아 온다. 더 달라고 하면 리필도 해준다. 다만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 식당의 나름 원칙이다. 힘도 들지만 “멀리서 오는 단골 생각에 눈 감을 때까지 가게를 하고 싶다”는 게 할아버지의 소망이다.
 

똑똑한 건 무엇이고, 어리석은 것은 무엇일까. “부자라고 밥 네 끼, 다섯 끼 먹냐?” 말은 이렇게 하지만 돈에 휘둘리는 게 인생살이다. 돈이 많다고 잘 난 것도 없지만, 가난하다고 행복할 것도 없다. 부자라고 ‘나쁜 놈’도 아니고, 가난하다고 해서 ‘착한 분’도 아니다. 또 탐욕에 눈이 먼 부자도 많고, 무능력한 빈자도 많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다. 부자이든 가난하든 돈으로부터 자유를 갈망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천원 짜리 선지해장국은 해방의 열매처럼 보인다.
 

“과실은 자기를 돈 주고 산 사람이나, 시장에 팔려고 기른 사람에게 참맛을 보여주지 않는다.” 대도시 보스턴을 떠나 숲속 오두막으로 들어간 헨리 데이빗 소로우는 자신의 대작 ‘월든, 혹은 숲속의 생활’에 이렇게 썼다.
 

그리고 말했다. “허클베리를 직접 따보지 않고 허클베리를 안다는 것은 대중의 착각이지 않을까ⵈ과일의 핵심적인 부분은 꽃이 핀 순간에 마켓 카트에 문질러지며 사라진다ⵈ하나님의 통치하에 있을 때는 단 하나의 순결한 허클베리가 시골 언덕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질 일은 없을 것이다.”

 

추락하는 인생에 날개는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빨리 바닥을 치는 게 낫다고 한다. 그래야 비로소 상승 기류를 타고 반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조금 덜 떨어지겠다고 아둥바둥 해 봐야 땀만 더 날 뿐이다. 

 

하지만 바닥을 확실하게 만나야 한다. 대충 떨어졌다가는 얼마 뒤 또 다시 추락할 수 있다. 자기 생각에는 분명히 바닥을 친 것 같은데 더 떨어지는 암담함을 겪을 때가 있다. 고생이라면 할 만큼 했는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진짜 바닥을 친 사람은 겸손해진다. 작은 것에 감사하게 된다. 밥을 하루만 굶어도 식욕은 참으로 순결해진다. 따끗한 밥에 고추장만 비벼 줘도 감지덕지한다. 여기에 계한 후라이 하나 더하면 감탄이 터져 나온다. 

 

돈도 마찬가지다. 정말 없어 보면 그 다음부터는 결핍에 군살이 생긴다. 돈이 귀한 것도 알고 돈 쓰는 데도 겸손해진다. 인간 관계도 그렇다. 거절과 거부를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쉽게 상처를 입는다. 유능한 세일즈맨은 거부 당하는데 도가 튼 사람이다. 

 

바닥을 경험해 보면 인생도, 돈도 , 사람도 달리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바닥을 쳐 봤는 가? 겸손과 감사에 답이 있다. 해장국 1,000원이 그래서 가능한 것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