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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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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도쿄대학 근처에서 오래 된 커피숍을 들른 적이 있다. 도쿄대학은 시내 여러 곳에 캠퍼스를 두고 있지만 혼고캠퍼스가 가장 오래 된 곳이다. 도쿄대학의 옛 정문으로 유명한 ‘아카몬’(붉은 문) 역시 이곳에 있다.

캠퍼스를 둘러보면서 잘 알지도 못하는 길을 이리저리 걷다보니 대학병원 건물이 나왔다.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서울대학병원에도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비슷한 병원 건물이 있어서다.

‘산시로’ 연못인가를 지나가는데 햇볕이 내리쬐는 초여름 날씨가 꽤 더웠다. 우에노 공원부터 이어져 온 산책에 다리도 피곤했다. 어서 카페라도 들어가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고 싶었다.

캠퍼스를 벗어나자 길 건너편에 이런저런 가게들이 보였다. 게중에 커피라고 쓰여 있는 곳의 문을 열었다. 순간 살짝 당황했다. 의자가 너무 작았다. 빨강색 가죽의자들이 조그만 테이블과 반듯하게 정리돼 있었는데 초등학교 의자들 같았다. “진짜 빨갛다.” 놀랄 정도로 순빨강이었다. 온통 빨강색인 의자들이 낯설었다.

의자에 앉으니 분위기가 눈에 들어 왔다. 의자 가죽은 반질반질 하게 윤이 났다. 마치 새 것 같았다. 빨강색은 가게 안을 흑백 사진 속의 빨강꽃처럼 점점이 강렬하게 치장했다.

자그마한 실내를 둘러보며 케케묵은 이름이 떠올랐다. ‘다방!’. 의자의 모양이며 테이블까지 그리고 출입문 옆에 붙은 계산대ⵈ수십 년은 가뿐히 뛰어넘어 옛적 한 순간으로 순식간에 마음을 되돌려 놓았다.

의자도 그만하면 앉기에 충분했고, 빨강색 의자가 낯선 것은 검정색에 눈이 물들었기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른 만큼 몸도 시선도 감각도 바뀐 것이다. 눈은 어느새 무채색에 익숙해졌고 몸은 푹신한 소파에 길들여졌다. 생각의 틀인들 온전할까.

마침 비틀즈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Let it be~ Let it be~~’

When I find myself in times of trouble, Mother Mary comes to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And in my hour of darkness, she is standing right in front of me. Speaking words of wisdom, let it be.

내가 근심의 시기에 처해 있을 때 어머니 메리가 다가와 지혜로운 말씀을 해주셨어 "그냥 그대로 둬"

암흑의 시간 중에도 어머니 메리는 내 앞에 똑바로 서서 지혜의 말씀을 해주셨지 "그냥 그대로 둬"

손님은 저쪽 테이블에 앉은 달랑 두 사람, 주인은 계산대에 앉아 이쪽을 힐끔거리는 중년의 남자. 아이스아메리카노보다는 ‘냉커피’가 어울리는 도쿄대학 ‘다방’에서 21세기의 어느 시간을 쉬어 지냈다. 발길을 이끈 손길에 ‘땡큐’할 뿐이었다.

대전에 가면 한남대학교가 있다. 대학문을 들어서면 얼른 눈에 들어오는 캠퍼스가 이국적이다. 동네 이름을 딴 ‘오정못’이라는 작은 연못 뒤를 메타세콰이어 나무가 두르고 있다. 소박하지만 정결한 공기다. 여느 대학 교정에 발을 내딪으면서 부딪히는 경박함이 느껴지지 않는다. 작은 공간도 가꾸어 내놓은 듯한 정성이 곳곳에 담겨 있다.

캠퍼스를 에둘러 뒷편으로 가면 한적한 길이 나오다 주택 서너 채가 나타난다. 선교사 가족들이 머물던 곳이다. 벽돌로 지은 다층 건물이 아니라 잔디밭을 낀 전형적으로 평범한 미국식 단층 가옥이다. 다만 지붕은 기와를 얹어 한국식으로 지었다.

학교를 세운 윌리엄 린튼 선교사의 집안은 후손을 포함해 4대째 한국에서 사역을 이어가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이유로 지난 90년대만 해도 한남대에는 학생을 가르치는 선교사들이 꽤 많았다. 영문과에 원어민 교수가 8명이나 된 적도 있다.

“1학년 때 큐어리 교수님을 보고 신입생들은 키득거리며 웃었어요. 일년 내내 똑 같은 양복을 입고 다녔거든요. 구두는 빵구가 나고 바지는 하도 입어서 반질반질했어요. 나중에 선교사님이란 걸 알고 조롱은 감동과 존경으로 바뀌었지요. 그분은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에게 쓰지 않았던 거에요.”

당시 학교를 다닌 졸업생은 선교사들의 헌신을 지금도 나눈다. 조근조근 말하며 늘 웃는 얼굴이던 로치 교수는 한국인 아이를 입양해 키웠고, 30대 활달한 여성이던 게이츠 교수는 어디서 구했는지 털털 거리는 소형 중고차 ‘다마스’를 몰고 다녔다. 리처드슨 교수는 직접 교재를 만들어 사용하고 종종 학생들을 선교사 사택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내가 먼저 인사하면 모두가 행복해집니다. 세상을 확 바꿔주는 인사 한마디. 안녕하세요.” 이 학교 학생들이 요즘 벌이는 캠페인이다. 투쟁이 아니라 사랑이 악을 이긴다는 진실을 청년들이 일찌감치 깨달았다.

 “1956년 미국 장로교 해외선교부에서 세운 한남대학교는ⵈ” “아시아의 명문 기독교 대학입니다.” “대학CEO로서 기독교정신(Christianity)을 근간으로” “아시아 명문기독교 대학으로 발전시키려 합니다.” “한남대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지식인을 배출하지 않을것이며” “우리 대학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학생이 주인공이라는 의식으로”

홈페이지에 실린 총장의 인삿말이다. 마무리에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 마태복음 5장 14절>”이라고 성경 구절이 달려 있다. 마치 신학교 총장의 연설문 같다.

선교사가 세운 학교는 많지만 그들이 헌신한 연고와 목표는 이제 희미하다. 소위 유명 대학일수록 떳떳하게 외치는 목소리가 없는 탓이다. 학생 유치에 급할 수도 있는 지방 사립대이지만 힘과 길의 원천을 바로 알며 행하고 있다.

프린스턴대학교 출신은 대학 이름 대신에 ‘뉴저지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고 말한다. “뉴저지에 프린스턴 말고 또 무슨 대학이 있느냐”는 오만방자한 자부심이다. 그래도 나름 유머와 위트가 담긴 젊은이들의 자부심으로 웃어 넘긴다.

헬라어를 가르치던 교수가 정색을 하고 “뉴저지에 있는 학교”를 졸업했다고 자기를 소개한 적이 있다. “무슨 소리인가?”했는데 프린스턴신학교를 나온 그가 설명을 덧붙였다. “프린스턴 출신은 다 그런다”는 것이다. 목회자에게 출신 학교가 그리도 자랑거리가 되는지 학생들은 ‘피식’ 웃었다.

프린스턴대학교를 찾아가 새뮤얼 휴 마펫 박사를 만났을 때 그는 프린스턴신학대학원 구석 구석을 안내해 줬다. 마펫 박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와 평양외국인학교를 세운 아버지 새뮤얼 마펫 선교사의 뒤를 이어 수십 년 동안 한국에서 사역을 했다.

당시에도 이미 구십을 훌쩍 넘긴 고령이었지만 기억력도 또렷하고 정정했다. 프린스턴은 은퇴한 지 오래 된 그에게 여전히 연구실을 제공했고 교내 책방은 그가 쓴 ‘아시아 기독교사’(A History of Christianity in Asia)를 한복판에 전시하고 있었다. 따뜻함과 친절, 지성과 겸손. 지금도 고인을 떠올리면 곧바로 튀어나오는 단어들이다.

마펫 박사가 도서관으로 인도해 벽에 걸린 한경직 목사의 대형 초상화를 보여줬다. 지금은 벽에서 떼어 보관한다고 들었지만, 한경직 목사는 프린스턴에서도 인정하는 졸업생이었다.

그때 백인 남자 한 명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마펫 박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자는 일본 선교사로 파송돼 도쿄에 있는 국제기독교대학교(International Christian University)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었다. 일본 선교에 관심 있다는 말을 들은지라 마펫 박사는 제자인 그를 적극 소개해 줬다.

국제기독교대학교는 개신교 신자가 가뭄에 콩 나듯 하는 일본에서 아주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일본의 기독교 인구는 개신교와 가톨릭, 정교회 등 모든 종파를 다 합쳐도 0.5%에 못미친다. 이런 와중에 2차대전 이후 일본 기독교 지도자들이 대학 설립을 결의하고 자금 마련에 나섰다.

점령군 사령관이던 더글라스 맥아더 장군이 명예이사장을 맡아 미국내 모금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맥아더 장군은 미국 교회에 일본을 복음화하기 위해 선교사로 나설 것을 촉구했고 이때 수 천명이 여기에 응답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전후 일본의 회복에 이들이 큰 공헌을 한 것은 물론이다.

종합대학교인 이 학교는 영어와 일본어 두 트랙으로 강좌가 마련돼 있다. 또 학생 수에 비교해 캠퍼스가 넓고 나무와 꽃 등 녹지가 많은 것으로 널리 알려졌다. 환경이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을 어려서부터 체득한 선교사들의 지혜가 담겨 있다.

그래서인지 학벌 사회로 유명한 일본에서도 쟁쟁한 졸업생들이 적지 않다. 추락하던 소니(Sony)를 살린 경영인으로 인정받는 CEO 히라이 카즈오, 후지제록스 사장 아리마 토시오, 유명 재즈피아니스트인 아카기 케이, 영화제작자로 널리 알려진 나라하시 요코, 요쿠 카즈오 대법원 판사, 기자 출신으로 우주비행사가 된 아키야마 도이히로 등도 국제기독교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미 연방상원의원을 지낸 제이 록펠러도 이 학교 출신이다. 그는 하버드대학교 1학년을 마치자마자 개교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국제기독교대학교에 와서 3년을 지냈다. 언어학자 제임스 마티소프 역시 하버드를 졸업하고 국제기독교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맥아더 장군의 호소를 듣고 젊은 인재들이 일본 선교에 동참한 셈이다. 홍콩침례대학교 앨버트 챈 총장과 미야가와 시게루 MIT 교수도 동문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눈에 띠는 졸업생은 아카시노노미야 마코 공주와 아카시노노미야 가코 공주일 것이다. 아키히토 일본왕의 첫째와 둘째 손녀들이다. 공주들의 아버지는 아키히토 왕의 차남 아카시노노미야 후미히토 왕자다.

일본 왕족은 거의 가큐슈인대학교를 다닌다. 초등학교부터 쭉 가큐슈인에서 학창 생활을 보낸다. 마코 공주도 초중고를 가큐슈인에서 다녔다. 그런데 대학을 진학하며 국제기독교대학교로 전격 진로를 틀었다.

동생 가코 공주는 가큐슈인대학교에 다니다 1년 만에 국제기독교대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언니 가코 공주의 영향이 컸을 듯하다. 좋아보이지 않았다면 구태여 대학을 옮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마코 공주는 대학을 같이 다닌 동급생 고무로 게이와 결혼을 하겠다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올해 결혼하려고 했지만 2020년으로 연기되고 남자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마코 공주는 약혼 계획을 밝혔으나 아사히 신문은 지난 8월 공주의 부모가 “현재로서는 약혹식을 치룰 수 없다”고 남자 친구 집에 통보했다고 보도했다. 스토리 전개 과정이 영화처럼 흐르고 있다.

일본 왕실의 전통을 깨고 기독교 대학을 다니다 평민 남자를 만난 공주의 사랑이 결실을 맺을 수 있을까. 마코 공주와 가코 공주의 발길을 끌어들인 기독교대학교의 매력은 무엇이었을까. ‘선교사의 무덤’이라 불리는 일본에서 하도 특이한 일이어서다.

“국제기독교대학은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국제적 사회인에게 요구되는 교양을 가지고” “하나님과 타자에게 봉사할 유익한 인재를 양성하고” “항구적인 평화 구축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국제기독교대학 홈페이지에 실린 안내문이다.  

켄 조셉 주니어의 부모도 맥아더 장군의 일본 선교 요청에 응한 젊은 부부 중의 하나다. 이들은 1951년 배를 타고 태평양을 건넜다. 훗날 아들 켄 조셉 주니어는 도쿄에서 네스토리안 기독교인 경교연구소를 차렸다. 일본에서는 경교의 한자어를 따라 '게이쿄'라고 말한다. 

경교 전문가 켄은 자신의 저서를 통해 AD52년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따라 도마가 인도에 복음을 전했다고 주장했다. 도마의 인도 선교 내용은 마펫 박사의 아시아기독교사에도 담겨 있다. 켄은 이미 5세경 일본에 네스토리안(경교)이라 불리는 기독교가 정착했다고 강조한다.

이미 6세기까지 많은 크리스천들이 일본을 향했다는 것이다. 일본은 실크로드의 끝이었고 네스토리안 기독교의 거점이던 시리아에서 걸으면 8년, 말을 타고는 4년이면 닿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한반도를 거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후쿠오카에 위치한 고지카이 사찰 박물관에는 십자가가 세겨진 8세기 앗시리아 투구가 소장돼 있으며, 이 무렵 중국에서 들어간 신약성경이 교토의 사찰에 전시돼 있다고 그는 밝혔다. 또 일본 불교의 아버지로 불리는 쇼토쿠 다이시 태자도 사실은 크리스천이었다면서 다양한 증거 자료를 제시한다.

그의 말대로라면 일본 왕가의 자손이 기독교대학교를 다닌 게 낯선 일만도 아니다. 영혼의 필그림은 수세대를 거쳐도 결국 구원의 도성에 이르기 마련이니 말이다. 하지만 아시아 땅 곳곳에 뿌려진 복음의 씨앗은 왜 1500년이 넘도록 땅 속에서 잠들고 있었을까. 누구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일까.


<사진출처 국제기독교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