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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인생의 선물 같은 순간

host 2018.05.12 14:35 Views : 6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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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 같은 순간이 있다. 감히 바라지도 못하고 정말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가슴이 가득 차는 때가 있다. 인생의 길에서 마주치는 아름다운 충돌이다. 피곤을 달래주고 지나 온 여정에 의미를 얹어주는 축복이다.
서울 북촌이 인기다. 이제는 서촌까지 발길이 넘쳐흐른다. 한옥 마을을 찾는 발걸음이야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TV 오락프로의 힘을 새삼 절감한 적이 있다. 어느 주말 북촌 골목길에 사람이 가득 찼다. 마치 걷기 행사장 같았다. 줄을 지은 인파는 여기저기 사진을 찍고 신기한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이전 주말 만해도 이렇게 몰려들지는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의 무대가 되자마자 바로 다음날 북새통을 이룬 것이다.
창덕궁은 과거 ‘비원’(秘苑)으로 불린 적이 있다. 엄연한 궁궐을 비밀의 동산이라는 이름으로 격하시킨 것이다. 일본이 한 짓을 고친 게 그리 오래 전의 일이 아니다. 어릴 적 ‘비원’에서 그림 그리기 대회에 참석하고 소풍도 갔다. 어이없게 그 때까지도 창덕궁은 ‘비원’이었다.
창덕궁 정문 왼쪽 원서동에는 궁궐의 돌담을 끼고 제법 큰 골목이 나 있다. 이 길을 지나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탁소에 들어갔다. 부동산 중개를 겸하는 간판을 보고 미소가 새어 나왔다. 세탁소와 복덕방의 만남이라... 낯설지만 사실 안성맞춤이었다. 동네 사정을 가장 잘 알 수밖에 없는 곳이지 않은가.
그렇게 마련한 월세 집에서 창덕궁의 춘하추동을 눈에 새기는 호사를 누렸다. 창덕궁은 외국 정상의 공식방문 때 한국의 전통 건축과 정원을 자랑하기 위해 소개하는 곳이다. 한 여름에도 시원한 바람이 숲을 타고 나와 옷깃을 파고든다.

한 겨울 눈이 덮인 조선의 정원은 살이 아릴만큼 아름답다.
짙푸르던 수목이 단풍에 물들어 가는 나날의 변화를 가을날 내내 창문으로 실컷 내다 봤다. 세찬 눈보라가 나무들 옆으로 들이닥치는 장관을 보다 못해 창문을 열고 차가운 바람에 얼굴을 내맡기기도 했다. 작은 싹들이 점점이 연녹색으로 숲을 가득 채울 수 있다는 사실도 봄날 아침 깨어나 창덕궁을 보고 놀라며 배웠다.
원서동 궁궐 담 길을 따라 걷다보면 금세 중앙고등학교 정문이다. 이미 여긴 계동이다. 오래 된 동네인지라 북촌 일대는 몇 개의 동으로 쪼개져 있다. 가회동, 명륜동, 삼청동까지 다닥다닥 붙어 있다. 예전 기준으로는 모두 다른 동네여야 했지만 이제는 하나의 동사무소가 통합 관할하는 고만고만한 크기일 뿐이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이나 물리, 화학 시간이면 백지에 기와집을 그리곤 했다. 본채와 사랑채를 넣고 담을 둘러치고, 부엌과 목욕실을 현대식으로 꾸미고, 대청마루에서 정원에 떨어지는 여름 소나기를 지켜보다 낮잠에 젖어드는 몽상에 빠졌다. 그 꿈이 이뤄진 건 아니지만 창덕궁 옆에서 보낸 내 삶의 한 해는 선물이었다. 더구나 외국서 살다 돌아 와 고향에서 받은 잊을 수 없는 선물이었다. 변변히 잘 한 것도 없는 터에 일방적으로 주고 얼떨결에 받은 은혜였다.
바로 그 다음해 여름 워싱턴DC에 갈 일이 생겼다. 독립기념일을 앞두고 미국 전역과 전 세계에서 관광객이 찾아와 거리를 누비고 있었다. 7월의 땡볕이 유난하던 날이었다. 공항에서 빌린 렌터카를 유니온 기차역에 반납하고 국무부 근처까지 가야 했다. 버스를 잘못 탄 탓에 엉뚱한 곳에 내렸다. 지도를 보니 구경삼아 걸어가도 될 듯싶었다.
하지만 몇 달 뒤 이사 와서 살면서 보니 녹녹치 않은 거리였다. 후텁지근한 더위에 가방을 메고 약속시간에 늦을까 급히 걷다보니 금방 땀이 줄줄 흘렀다. 백악관 남쪽 뜰 앞의 프레지던트 파크를 지나다 공원 매점을 찾았다.
온몸이 땀에 젖고 숨을 몰아쉬며 라지사이즈 컵에 얼음을 담은 콜라를 주문했다. 몸집 좋은 중년의 흑인 아주머니가 돈을 받고나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다. 그리곤 종이로 포장된 조그만 물티슈를 두 장 건넸다. 무뚝뚝한 표정은 별로 바뀌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에는 땀에 젖은 이방인을 향한 친절과 애틋함이 담겨 있었다.
그날 흑인과 화해했다. 미국서 생활하면서 나름 흑인에게 ‘당했다’고 생각하며 옹골차게 박힌 미움과 편견이 신기하게도 순식간에 녹기 시작했다. “이게 흔히 말하는 흑인의 정인가 보다”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마웠다. 대단한 것은 아니었지만 난데없이 받은 선물은 오래 묵은 마음의 짐까지 가볍게 덜어주었다. 세상을 보기에 한결 편해졌다. 훌륭한 선물이었다.
야누스 코르차크. 고아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단지 먹이고 키워서 붙은 별명이 아니다. 그는 바르샤바에서 이름이 알려진 의사였다. 그러다 첫 소설 ‘거리의 아이들’과 ‘살롱의 아이들’이라는 소설이 잇따라 인정을 받으면서 작가로도 유명세를 탔다. 야누스 코르차크는 그의 필명이다. 원래는 야나슈인데 식자공의 실수로 이름이 바뀌었다. 

코르차크는 1차 대전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가 돌아와 고아원을 맡게 됐다. 바르샤바에 ‘고아의 집’ ‘우리들의 집’ 등 시설을 마련하고 온힘을 쏟았다. 그는 2차 대전 전쟁의 와중에도 간신히 구한 먹거리를 고아들과 나눠 먹고 곁을 떠나지 않았다. 1942년 나치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강제수용소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유대인인 코르차크를 구원하려는 구명운동이 일었다. 그의 희생과 헌신을 목격한 이웃들이 나선 것이다. 심지어 독일군 장교까지 나섰다. 수용소로 향하는 기차에 탈 때 일부러 “당신은 유대인이 아니니 내리라”고 했지만 코르차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당신의 아이가 아프고 불행하고 위험에 처해 있다면, 당신은 그 아이를 버리겠습니까? 내가 어떻게 200여 명이나 되는 우리 아이들을 버릴 수 있겠습니까?”

그의 부탁은 간단했다. “군인들에게 아이들을 밀지 말라고 해 주십시오. 줄을 서서 갈테니까. 아이들이 놀라거나 겁에 질리지 않도록 해 주십시오.” 그리고 아이들에게 말했다. “자, 지금부터 여름휴가를 가는 거야. 가다가 길을 잃거나 흩어지지 않도록 줄을 잘 맞춰서 가도록 하자.” 고아들은 가지고 있던 옷 중에서 가장 좋은 걸 골라 입고 배낭을 메고 물통을 둘러맸다. 죽음의 수용소 크레블랭카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그는 불안해하는 아이들에게 계속 노래를 시켰다. “어떤 폭풍과 비바람이 몰아쳐도 우리는 전진하리라.”
‘천사들의 행진’에는 그와 동역자 스테파니아 빌친스키, 10명의 선생님들 그리고 192명의 고아 어린이가 함께 했다. 그리고 모두 가스실에서 하늘나라로 떠났다.
아이들은 포성이 울릴 때마다 어떤 눈으로 선생님들을 바라 봤을까. 군인들의 총부리 끝에서 기차에 오르며 그 작은 머리 속에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을까. 그저 코르차크와 선생님들이 함께 가니 무서운 마음을 가라앉히려 안간힘을 썼을 것이다. 겁나고 떨렸지만 울음을 참을 수 있었을 것이다. 옷을 다 벗고 발가벗긴 채 가스실로 줄서서 들어가면서 아이들과 선생님들은 울고 있었을까.
코르차크와 선생님들은 살아서도 따뜻한 선물이었지만 죽음으로 향하는 길목까지 아이들의 손을 잡고 동행하는 진정한 선물이었다. 모든 사람은 구원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 세상에 선물 싫어하는 사람이 없고 구원이 필요 없는 사람도 없다. 구원은 죽어서도 살아서도 필수적이다. 영원한 생명도 누려야 하지만 이 땅에 사는 나날 구원해 주는 힘으로 살아야 한다.
내 힘, 내 머리, 내가 구축한 인간관계로 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더 겪어야 할 게 많다. 청년이야 시간이라도 있다지만, 그 역시 하루라도 일찍 구원의 힘을 누리며 인생을 성공적으로 꾸려가겠다고 자각하는 게 백만 배 이롭다. 하물며 젊지도 않다면 말해 무엇 하겠나. 영혼이든, 육체이든, 돈이든, 건강이든, 날 돕고 구원해 주겠다는 선물은 그저 빨리 챙기고 볼 일이다. 미련으로 버티는 사이 시간은 흐르고 힘은 빠진다.
작든 크든, 싸든 비싸든, 내가 받고 싶은 선물은 남도 받고 싶어 한다. 그리고 선물 하나가 생명을 살릴 수 있다. 죽음으로 가는 길에서도 기쁨과 안심을 주는 선물이 될 수 있다. 주고 볼 일이다. 나누고 볼 일이다. 그냥 주는 거지만 받는 사람에게는 가슴을 녹이고 다시 살아날 기운을 북돋아 주는 위대한 선물이 될 수 있다. 선물 받은 사람이 해야 할 책임이고 의무다.
지금도 교회는 선물을 나눠준다. 단지 세상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할 뿐이다. 그 탓은 올곧게 스스로 지어야 한다. 부족하다면 부족한 게다. 더 열심히, 더 많이, 가장 중요한 일로 삼아 선물을 줘야 한다. 받은 게 크다고 진심으로 느낀다면 어떻게 인색을 부리고 뒷전으로 미루겠는가. 진심과 정성이 담기지 않는다면 선물이 아니다.
그래도 억울한 구석이 남는다면 더욱 더 많이 받을 것을 기다리면서 자신을 뒤돌아보고 달래면 된다. 어차피 칭찬받으려 하는 게 아니다. 선물은 주었으면 그만이다. 보답을 받으려 들면 선물도 아니다. 받은 게 고맙고 또 해야만 하니까 나누는 것이다. 선물을 받는 사람의 가슴속에 솟구칠 기쁨보다 더 큰 보답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