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왼쪽)와 우베 라이지펜
뉴욕에서는 현대미술관(MoMA)을 반드시 가봐야 한다. 뉴욕 일대에 살거나 방문하는 사람은 많다. 하지만 MoMA에 눈길조차 주지 않은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아트니 미술이니 ‘그딴 것’에 관심이 없더라도 인생에 꽃 한 송이 품는 마음으로 꼭 한번 둘러봐야 한다. 뉴욕에서만 가능한 사치이기 때문이다.
현대 인간이 빚어낸 물질 이상의 세계가 그곳에 응집돼 있다. 매일 눈에 보이는 세상만 전부가 아니라는 단순한 진리를 가슴 속 서랍에 넣어준다. 그도 저도 다 싫으면 그저 잠시 미술관 계단 앞에 앉아있기라도 해보라. 뉴욕 땅에 발을 디뎠으니 본전이라도 건지는 심정으로 지나는 사람들을 지켜보라. 그 순간만큼 자신과 친해지는 때를 찾기 쉽지 않으리.
지난 2010년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라는 행위예술가가 MoMA에서 ‘예술가가 여기 있다’는 퍼포먼스를 가졌다. 평론가들이 뉴밀레니엄을 대표하는 작품에 선정할 정도로 관심을 모은 작품이다. 마리나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미술관 문을 여는 내내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꼼짝도 하지 않은 채 관객과 마주 앉아 눈으로 소통했다. 퍼포먼스는 총 736시간 동안 이어졌고 이 시간 MoMA를 찾은 사람은 850만명이었다. 뉴욕 시민의 수보다 많은 수치였다.
관객은 긴 줄을 이루며 차례차례 마리나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서로를 응시하다 자리를 떴다. 그러다 백발의 한 남자가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마리나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규칙을 깨고 그 남자에게 손을 내밀어 꼭 잡았다. 놀라움 속에 숨이 막힐 듯 한 정적이 공간을 채웠다. 마리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고 관객은 손뼉을 쳤다. 그리고 1분 뒤 남자는 머뭇거림 없이 일어섰다. 감정을 추스른 마리나도 눈물을 닦고 다시 관객과 눈을 맞췄다.
남자의 이름은 우베 라이지펜, 독일 출신의 예술가로 ‘울라이’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그는 유고 태생인 마리나와 1970년대말부터 10년 동안 함께 작품 활동을 벌였다. 연인이었던 두 사람은 1988년 헤어졌다. 마리나와 울라이는 각자 중국 만리장성의 양쪽 끝에서 출발한 뒤 고생 끝에 중간에서 만나 마지막 포옹을 나눴다. 이들의 이별 의식이자 사랑의 퍼포먼스였다. 두 사람은 20년도 더 흐른 뒤 뉴욕현대미술관에서 만나 1분간의 해후를 가졌다. 그리고 다시 이별했다. 퍼포먼스가 현실이 됐다.
예술가 여덟 명을 인터뷰한 책 ‘여기 아티스트가 있다’에 담긴 내용을 보다 뜬금없이 기억 저편에 깊숙이 잠긴 장면이 떠올랐다. 오래 전 일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출장을 마치고 남가주로 내려오던 길이었다. 101번 프리웨이를 탔다. 샌프란시스코로 가던 때처럼 5번 프리웨이를 타면 빠르고 편했지만 오던 길로 가고 싶지 않았다.
101번 프리웨이는 역시 볼 게 많았다. 드넓은 농장이 펼쳐졌고 바다를 끼고 달리기도 했다. 아기자기한 농촌 마을은 아름다웠다. 그런데 시간이 예상보다 무척 더 걸렸다. 프리웨이는 어느새 끝이 나고 조그만 마을을 지나치며 종종 신호등 앞에서 정지해야 하는 하이웨이로 변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먹을 데가 없었다. 흔한 패스트푸드 체인점 하나 눈에 띠지 않았다. 5번 프리웨이는 일정 구간이 지나면 주유소와 식당이 들어선 상가가 어김없이 기다리곤 했다. 하지만 101번 하이웨이를 한참을 달려도 낯선 여행객이 주린 배를 채울 곳은 나타나지 않았다.
식당을 포기하고 마켓이라도 나오길 기다리며 운전했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산자락까지 양옆으로 평원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뭔가를 심은 밭이 그 넓은 대지를 산자락까지 채우고 있었다. 어느새 여름의 긴 햇볕도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목까지 말랐다.
그때 ‘마켓(Market)’ 사인을 지나쳤다. 도로 옆으로 집들이 몇 채 들어섰고 그 중 한 건물에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그나마도 바람과 먼지, 태양의 열기에 긁혀 색깔이 희미하게 바래 있었다. 낯선 지방에서 초라해 보이는 그곳에 들어가도 될까? 잠시 머뭇거렸다. 미국에 온 지 몇 년 되지도 않을 때였다. 호기심만큼이나 두려움도 컸던 시절이다.
마켓 안은 예상 밖으로 넓고 천정도 높았다.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종업원도 보이지 않았다. 안쪽 끝까지 들어가자 다행히 샌드위치를 만드는 델리 코너가 보였다. ‘먹을거리가 있구나’ 안도할 즈음 주인이 나왔다. 동양 사람이었다. 인적 자체가 드문 외진 농촌에 웬 동양인인가? 서로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히고 우리는 서로 순식간에 알아챘다. ‘한국 사람이구나.’
무뚝뚝한 사람이었지만 그는 말을 안 할 수 없었다. 얼마 만에 만나는 한국인인가. “손님들은 거의 히스패닉 노동자들이에요. 한국 사람은 없어요. 저 산 너머 한국 분이 있는데 서로 일을 하니까 만날 수가 없죠. 차로 한참 와야 하는데 무슨 일이 생겨야 오가는 거죠.” 그는 친척이 있으며 공군기지 근처에 모여 산다고 말했다. 자동차를 타고 대여섯 시간은 족히 가야하는 거리였다. ‘몇 년 죽어라 돈 모아서 이사 갈 거’라고 했다. 그게 그의 꿈이고 목표였다.
그날의 샌드위치를 잊을 수 없다. 지금까지 좋은 곳, 비싼 데서, 별의별 샌드위치를 먹어 봤지만 그가 만들어 준 작품만한 것은 없었다. 모든 재료를 아끼지 않고 넣어서, 할 수 있는 모든 실력을 부어서, 가능한 최고의 샌드위치를 그는 만들어 줬다. 봉지에 음료수 몇 병과 과자 봉지들도 넣었다. 그리고 끝내 돈을 받지 않았다. 그저 ‘시간나면 한번 들르라’는 말만 두어 번 했다.
운전을 하며 밤길을 내려오면서 울었던 기억이 난다. ‘우리는 왜 이렇게 남의 나라까지 와서 힘들게 살아야 하나.’ 그런 한탄을 한 것 같다. 처음 본 사람과 잠깐의 만남 뒤, 그리 슬플 리 없건만 눈물 나는 이별이었다. 주방에 남은 그의 가슴에는 고향과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얼마나 사무쳤을까. 그에게 남겨진 이별의 무게는 분명 나의 것보다 몇 배 더했을 것이다. 도마를 닦는 그의 팔 등에 눈물이 떨어지는 장면을 마치 눈으로 본 것만 같았다.
세월은 패스트 포워딩 처럼 쏜살같이 흘렀다. 간다, 간다, 하면서 다시 그 마켓을 찾아가지 못했다. 지금은 어디쯤인지 짐작도 못한다. 가본들 그가 있을 리 없고, 에어컨이 추울 정도로 나오는 각가지 식당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을 것이다.
그래도 그는 잘 살고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들과 가까이 오가며 함께 먹고, 말하고, 살도 맞대며 지내고 있으리라. 황량한 마켓 주방 안 저쪽에서 외롭게 걸어 나오던 모습은 막연하고 얼굴도 그릴 수 없지만, 그는 이제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미국 네브라스카주에 사는 올리비아는 세 살 난 예쁜 여자아이다. 갖 태어난 아기가 세 살이 되면 재롱은 상상을 초월한다. 춤추고 노래하고 웃고 재잘거리며 품에 파고들어 매달리는 어린 딸은 인생에 일정 기간 허락된 지극한 기쁨이다. 순진하고 깨끗한 눈망울에 호기심을 가득 품고 세상을 바라보는 어린 올리비아는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DIPG라는 이 뇌종양은 어린이들만 걸리고 생존율이 0%다. 발병 후 몇 달 안에 죽는 치명적인 뇌암이다.
어느 부모가 갑자기 세 살짜리 딸이 죽어가는 모습을 제정신으로 지켜 볼 수 있을까. 올리비아 엄마는 이메일을 썼다. 펜실베이니어주 피츠버그에 사는 루카스의 엄마에게 보낸 편지다. 두 살 난 남자아이 루카스는 선천적으로 담도폐쇄증을 앓고 있었다. 배가 부풀어 오르고 간을 이식받지 못하면 얼마 못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비슷한 또래의 간을 이식받아야하고 무엇보다 체질이 맞아야 했다. 간이식이 이뤄진다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루카스에게 이식하는 조건이 맞는다면, 내 딸이 언제 죽을지는 모르지만 간 이식을 해주겠다.’ 올리비아 엄마가 루카스 엄마에게 보낸 이메일 내용이다. 작은 멍만 들어도 가슴이 시리고, 무릎이 까져 피만 조금 나도 자책감이 밀려드는 게 부모의 심정이다. 세 살 난 자식의 간을 내주겠다고 메일을 쓰기까지 억장이 무너지는 슬픔인들 오죽했겠는가.
루카스의 사연을 SNS를 통해 접한 한 네티즌이 올리비아 엄마의 페이스북을 본 게 기적의 시작이었다. 망설임 끝에 용기를 내 올리비아 엄마에게 루카스의 처지를 전해주면서 ‘올리비아의 병이 너무 안타깝지만 딸이 다른 사람을 살릴 수 있다’고 메일을 보냈다. 올리비아의 엄마는 직접 루카스의 엄마에게 메일을 보내 간 이식을 약속했다. 하지만 어린 딸의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애타게 고대하는 희망이 된 셈이었다.
올리비아는 얼마 뒤 숨을 거뒀다. 지구별에서 겨우 3년을 보낸 올리비아는 두 살짜리 루카스에게 간을, 짧은 창자 증후군으로 고통을 받던 네 살 난 안젤로에게는 창자를, 다른 두 어린이에게는 심장과 각막을 선물하고 천국으로 떠났다.
소망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죽음이 끝이라고 여기면 내릴 수 없는 결정이다. 이 땅 위의 삶이 가진 의미를 모르고선 할 수 없는 희생이다. 올리비아 부모는 사랑하는 어린 딸의 생명의 가치를 지순한 높은 수준으로 올려주었다. 육신의 아버지와 어머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독립기념일 불꽃놀이가 한창이던 7월4일 ABC방송은 ‘기적’이라는 제목으로 올리비아의 스토리를 전했다. 올리비아의 엄마 로레사 스웨드버그는 딸이 다른 아이들을 돕게 된 걸 알고 평안을 찾는 중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주 훌륭한 어린 딸이었어요. 미치도록 그리울 거예요. 하지만 저에게는 거듭난 믿음이 있어요. 이번에도 하나님의 손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애원하며 기도하는 가족들에게 올리비아가 어떤 기적이 되는지를 뻔히 알면서 어떻게 가만히 있겠어요?”
소망이 없는 이별은 절망이다. 그러나 소망이 살아 있는 한 이별은 끝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을 무시한다면 이별은 그것으로 끝장이다. 사람이 물과 단백질 덩어리에 불과하다면 인생은 얼마나 초라한가. 고난은 뭐 하러 견뎌내며 희망은 가져 무엇 하나. 사랑도, 그리움도, 희생과 헌신도, 심지어 외로움과 두려움도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
그 모두가 그저 화학적 반응 뿐이라면 부모, 배우자와 자녀, 친구, 연인, 이 모든 이는 무슨 필요가 있는가. 인간의 궁극적 이별은 죽음이다. 그러나 생명은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기에 이별은 또 다른 시작이 된다. 소망을 간직하는 믿음만이 이별에 담긴 비밀을 풀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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