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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샌타바바라의 젊은 영혼들

host 2018.05.12 14:40 Views : 574

UC샌타바바라 캠퍼스에 들어설 즈음 마침 관광버스 한 대를 만났다. 여름방학이 한창인데 대학교를 찾아올 관광버스라면 우리 일행 말고 누가 있으랴. 넓은 교정에서 어디로 가야하나 걱정이었는데 마침 잘됐다 싶어 버스를 열심히 쫒아갔다. 바램대로 버스는 지도에서 언뜻 보아둔 방향으로 길을 잘 찾아가고 있었다. 기숙사 앞에 버스가 서고 사람들이 내렸다. 버스 반대쪽에 차를 세워서 누가 내리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다른 버스들을 기다리던 참에 고즈넉하게 난 길이 보여 걸어가 봤다. 갑자기 가슴이 요동쳤다. 그림에서인지, 영화에서인지, 꿈에서인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심장이 뛰었다. 드넓은 잔디 저 멀리 큼지막한 나무가 딱 한 그루 서 있고 그늘에는 두 사람이 앉아 나무 기둥에 등을 기대고 있다. 호수 물이 바로 옆까지 들어와 있는 중간에 조그만 섬이 떠 있었다. 이 모두의 뒤에는 오직 푸르디푸른 태평양과 하늘뿐이고… 누군가 가장 원하는 풍광을 그림처럼 그대로 꾸며 놓은 것 같았다.
차마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 꿈결같은 풍광 안에 들어가 있는 두 사람을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다시 찾아 물안개에 젖은 사진을 겨우 건졌다. 한낮의 환한 빛이 사그라지고 사람이 떠난 경치는 어제처럼 감동적이지는 않았다. 사람은 여기서도 꽃보다 아름다웠다. 그러나 망막과 기억에는 가슴을 설레게 한 장면이 선명하게 자리 잡았다.
정작 가야 할 목적지는 이쪽이 아니었다. 전화를 걸고 부랴부랴 캠퍼스 반대편으로 찾아갔을 때는 장애 학생들과 자원봉사자들이 여러 대의 버스에서 내리며 짐을 옮기고 있었다. 먼저 왔나 했는데 오히려 늦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심장을 뛰게 하는 한 순간을 얻었다. 길을 잘못 들어선 덕분이지만 소중한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다시 그곳을 찾지는 않으리. 그 시간, 그 곳에서 흠뻑 누린 기쁨은 그것으로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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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C샌타바바라 캠퍼스에서 장애인 사역단체인 밀알이 마련한 사랑의 캠프는 2박3일 동안 진행됐다. 발달장애인, 봉사자, 교사와 스탭 등 500여 명이 참여한 캠프다. 미주 지역에서 가장 큰 규모의 발달장애인 행사다.

캠퍼스 광장에서 첫날 밤 세족식과 성찬 예배가 열렸다. 교사와 봉사자들이 무릎을 꿇고 장애학생들의 발을 닦아 줬다. 순서가 한참 진행되는 도중 갑자가 발달장애 학생 한 명이 무리를 벗어나 계단을 뛰어올랐다. 그 순간 여학생 봉사자가 뒤를 쫓아 달리고 어느새 다른 남학생이 앞을 가로막았다. 둘은 장애 친구를 달래며 두 팔을 잡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휠체어를 타고 있는 여학생 주변은 건장한 체격의 언니와 오빠 봉사자 네 명이 둘러싸고 있었다. 순서가 끝나고 댄스파티가 시작되자 네 사람은 땀을 흘리면서도 무거운 휠체어를 이리저리 돌리며 기분을 맞추려 정신이 없었다. 한 두 사람으론 감당할 수가 없어서 힘 좋은 오빠, 언니 네 명이 붙은 것이다.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들 다섯 명과는 여러 번 조우를 거듭했다. 낮에는 기숙사 계단에 앉아 더위를 피해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로비의 소파에 잠깐 몸을 기대고 교대로 동생뻘 장애인을 돌보는 모습도 봤다. 귀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언니들이 장애 학생 뺨에 진한 뽀뽀를 하고, 손을 잡아달라고 뻗치기만 하면 파김치가 된 오빠들이 얼른 몸을 구부렸다. 솔직히 충격이었다. 이제 겨우 스물이 될까 말까 하는 나이에 말썽피우는 발달장애인이 저렇게 예쁘고 귀여울까?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처지에 말이다.
일행이 묵은 기숙사 빌딩에는 남녀 화장실 겸 샤워장이 각각 하나 뿐이었다. 이를 닦으러 들른 화장실에서 장애학생 한 명이 문을 연 채 용변을 보고 있었다. “제임스 지금 똥 눠(James pooh, pooh now).” 그 앞에서 봉사자 학생이 묵묵히 지켜보고 있다. 말마다 대꾸해 주고 어린 동생 다루듯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캠프 내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봉사자들도 있었다. 밤중에 장애 친구가 방을 뛰쳐나갈까 걱정이 돼 문을 책상으로 막고는 그 앞에 매트리스를 깔고 쪽잠을 자기도 했다. 다른 봉사자는 문고리를 잡고 졸았다고도 한다. 식당에서는 옆에 끼고 앉아 밥 먹는 걸 도와야 하고 한 시도 한눈을 팔 수 없다. 씻기고 먹이고 재우고 놀아 주고 지켜주고… 수호천사가 따로 없었다.
봉사자들이래야 한국에서는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하는 9학년부터 대학생들이다. 자원봉사자들은 모두 장애인 학생들과 똑같은 액수의 참가비를 내고 캠프에 참여했다. 돈을 받아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자기 돈까지 내며 여름방학의 며칠을 기꺼이 내놓은 것이다.
UC산타바바라 캠퍼스에는 여러 종류의 단체가 캠프를 열고 있었다. 백인 청소년들로 구성된 모임도 많았다. 아마도 중서부나 남부 어디선가 왔으리라. 동양사람 보기도 힘든데 아시안 발달장애인을 처음 보는 아이들이 거의 다 일 것이다. 영어를 말하는 비슷한 또래의 코리안 아메리칸 학생들이 동족의 발달장애인 친구들을 보살피는 모습을 보고 놀라는 눈빛을 여러 번 목격했다. 식사 전에 기도하는 장면을 한참동안 바라보는 애도 있었다. 우리 아이들이 정말 기특하고 난데없이 어깨가 으쓱했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리고 부끄러웠다. ‘저 시절을 어찌 보냈나’ 자꾸 떠올랐고, 지금도 본받을 어른으로서 떳떳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봉사자 학생들도 당연히 집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죠. 다른 청소년처럼 게으름도 피우고 부모에게 떼쓰는 평범한 학생들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교실이나 사랑의 캠프에 오면 딴 사람이 되는 거죠. 자기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내가 꼭 돌봐야 할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변화를 일으키는 거예요.”
이영선 미주 밀알 총단장은 “세상에는 ‘행복 바이러스’라는 게 분명히 있는 것 같다”며 흐뭇하게 웃었다. 사랑도 전염이 되더라는 것이다. 교사와 스탭, 자원봉사자와 장애 학생들 사이에 빠르게 퍼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작은 기적을 수도 없이 꽃피운다는 이야기다.
‘발명왕’ 에디슨이 초등학교에서 3개월 만에 퇴학당한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담임선생님이 기록한 에디슨은 ‘혼란스러운 녀석’이었다. 훗날 에디슨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가 나를 만들었고 믿어주었기에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는 인생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간디 역시 한 때 비행 청소년이었다. 힌두교도인데도 거침없이 고기를 먹고 돈까지 훔치고 다녔다. 그러다 정신을 차리고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아버지에게 썼다. 아버지는 눈물을 흘리며 아들을 품었다. 간디는 이때 사랑을 배우고 비폭력의 힘을 느꼈다.
20세기 최고의 천재로 불리는 아인슈타인은 지리, 역사, 라틴어 과목에서 낙제했다. 좋아하는 수학과 물리만 잘했다. 지금 같으면 대학가기도 힘들었지 모른다. 그래도 끝없는 상상력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끈기로 큰 인물이 됐다. 그리고 이런 명언을 남겼다. ‘한 번도 실수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번도 새로운 것을 시도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퀴리 부인은 전염병으로 어머니와 언니를 모두 잃었다. 그래도 죽자고 공부해 1등을 놓치지 않았고 열여섯 살부터 가정교사로 돈을 벌었다. 그리고 어린이 위인전 시리즈에서 뺄 수 없는 반열에 올랐다.
모두 자신의 단점과 고난을 이겨내고 에너지를 극대화해 성공했다. 어리고 젊은 시절을 잘 보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자기 인생의 길을 넓게 닦아 갔다. 그리고 모두가 알아주는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남을 위해 희생한 시간만큼 귀중한 게 있을까. 자신의 한계나 열악한 여건을 이겨내고 유명한 사람, 부유한 사람, 높은 사람, 뛰어난 사람이 되는 것도 훌륭하다. 그러나 영웅이나 위인, 부자나 권력자가 되지는 않아도 된다. 절실하게 나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에게 온전하게 사흘을 나눠 준 젊은 날의 추억보다 단단한 인생의 바탕을 쉽게 찾을 수는 없다. 그저 나보다 남을 먼저 앞세우고 그래서 나를 잠시 희생한 시간은 위인의 어린 시절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젊은 봉사자들은 자신들의 조그만 헌신이 그들 인생 내내 어떤 축복을 부를지 아직 모를 것이다.
봉사와 나눔도 해본 사람이 잘하고 더 한다. 마음으로야 착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랴. 누구나 자신과 내 자식은 그래도 나은 편이라고 착각한다. 소수의 착한 사람과 역시 소수의 나쁜 사람 그리고 대다수의 나쁘지도 않지만 착하지도 않은 사람들로 세상은 채워진다. 착한지, 착하지 않은지는, 한 짓을 보면 안다. 어떤 착한 일을 했는지 각자 돌이켜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내 머리 안에서 도와주고, 머리 안에서 돈 주고, 머리 안에서 위로하고, 머리 안에서 정직하고, 머리 안에서만 정의롭다면 누구인들 인정하겠는가.
사랑의 캠프 발달장애 학생들을 돌보는 봉사자 가운데 많은 경우 매주 토요일 사랑의 교실에서도 봉사를 하고 있다. 젊은 봉사자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볼수록 뚜렷하게 떠오르는 게 있다. 바로 안타까운 자화상이다. 단순하지 못한 머리다. 순진하지 못한 얼굴이다. 양보를 모르는 손과 발이다. 안절부절 하는 몸짓이다. 모든 인생은 죄인일 수밖에 없다.
새삼 잘못 들어선 길에서 마주친 한 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되새긴다. 평안과 고요함이 밀려온다. 그리고 꿈결 같은 그림 안에서 우연을 만들어준 보이지 않는 손길을 본다. 길을 잘못 들어서지 않았다면 자칫 비켜 지나갔을 소중한 장면으로 구태여 이끌어준 섭리를 생각한다. 그러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두려워하지 말라고, 외로워하지 말라고 달래주는 목소리를 듣는다. 당당하게 달려가라고, 정의롭게 살라고, 사랑으로 나눠주라고, 겸손하게 평화를 누리라고 뒤를 밀어주는 따뜻한 기운을 느낀다. 감사한 마음이 절로 차오른다. 그리고 어린 후배를 통해 배운 교훈을 등에 지고 앞으로 살아갈 방향을 조용히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