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카유보트가 그린 ‘파리의 거리, 비오는 날’은 아주 큰 그림이다. 어느 날 신문에 실린 사진에 훅 끌렸다. 그림 속에서 비 오는 19세기 파리의 거리를 신사숙녀가 우산을 받쳐 들고 지나간다. 그런데 돌을 깐 도로 바닥이 빗물에 젖어 반질반질 윤이 난다. 그림 속 보슬비가 바람에 휘날리며 날아 와 실제로 볼에 와 닿는 촉촉한 기분이다.
아마 이 그림을 보았을 때 비를 기다리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140년 전 비 내리는 파리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돌길을 적시는 가랑비가 천천히 위로의 빗물로 가슴을 채워줬다. 우산을 들고 빗속을 걷는 사람의 모습은 그때나 지금이나, 파리나 이곳이나 다르지 않은 것일까.
시애틀은 누구나 알듯 비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에 살아남을 수 있느냐 여부는 비를 사랑할 수 있는 가에 달렸다.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올라 온 이주민의 상당수는 얼마 못 가 두 손을 들고 짐을 싸 남행 고속도로를 탄다. 햇볕이 작열하는 남가주 기후에 길이 든 마음이 견딜 수 없게 우울해지기 때문이다.
장마철 장대비 같은 비는 드물다. 보슬보슬 간지러운 비가 사방에 뿌옇게 커튼을 내린다. 우산을 쓰고 다니는 사람은 거의 보기 힘들다. 비 속에서 산책도 하고, 조깅도 하고, 카약을 타는 사람도 봤다.
시애틀이 커피의 고장이 된 데는 보슬비 내리는 오후의 거리 모습이 단단히 한 몫 했을 것이다. 비가 좋은 사람에게 시애틀은 훈훈한 도시이다. 따뜻한 커피잔 앞에서 창 밖으로 쌀쌀한 거리를 내다 보며 그냥 앉아있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한참을 메말랐던 하늘에서 비가 내린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고 나서다 무릎을 꿇었다. 빗방울에 젖은 작은 꽃과 이파리들을 가까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힘에 겨워 처지고 바짝 타 들어가던 어제의 세상이 아니었다. ‘만물이 신선하여라.’ 잔디도 나무도 잡초도 모두 자기 색깔을 진하게 내뿜고 있었다.
모든 생명에는 생명수가 필요하다. 물 없이도 살 수 있을 것 같던 메마른 생명도 막상 빗물을 부으면 얼굴부터 달라진다. 깔끔하고 활기가 돌며 젊어진다. 아름답고 건강하고 정신이 번쩍 든 눈에는 생기가 돌고 웃음기까지 머금는다. 생명수는 위대하다.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시나이 광야 남부에서 맞은 새벽에 ‘4억 년 전에 만들어진 골짜기를 통해서 느끼는 감정’을 토로했다. 그는 이 감정을 ‘2,300미터 높이의 화강암 산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 일련의 가파른 협곡의 벽에 표시된 수천 년의 침식 흔적을 통해서 느끼는 감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시나이에서 신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의 산과 골짜기를 보면 자연스럽게 이 행성이 우리가 태어나기 오래 전에 우리의 손이 아닌 다른 것에 의해서 우리가 모을 수 있는 힘보다 더 큰 힘에 의해서 만들어졌으며, 우리의 소멸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지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길가에 꽃과 패스트푸드점이 있을 때는 생각하기 힘든 것’이라는 단서를 붙이면서 말이다.
장엄한 자연 앞에서 어떤 이는 절대적 존재를 떠올린다. 도저히 풀 수 없는 자연의 수수께끼에 직면한 여행자는 자연스럽게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귓가를 속삭이는 순간을 경험한다.
알랭 드 보통은 시나이 반도의 한 귀퉁이에서 ‘세속적인 정신으로 생각할 때도 신이라는 말이 크게 어긋나는 명칭 같아 보이지 않는 존재’와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했다. ‘성경의 역사는 시나이에서 야영을 하는 여행자가 어차피 그곳에서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상을 강화해 줄 뿐이다.‘
세계가 감탄하는 이 천재 작가도 삭막한 시나이 광야의 밤 하늘에 펼쳐진 별의 바다를 바라보다 수억 년 시간에 잠긴 광대한 자연의 비밀을 풀었다. 그의 말대로 패스트푸드점과 뿌리 뽑힌 꽃들이 진열돼 있는 분주한 도시의 거리에서는 찾기 힘든 실마리일 수도 있다.
하지만 ‘비 내리는 파리의 거리’에서도 절대자의 흔적은 뚜렷하다. 도로를 이루려 조각난 돌들과 그 위를 닦아 빛내는 빗물을 응시하면서, 언젠가 비 내리는 시애틀에서 커피숍에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던 따스한 안도감이 다시 살아났다.
시간은 흐르고 밟고 있는 땅은 달라졌다. 그러나 건조한 시나이 반도를 바람으로 휘감으면서 화강암 협곡에 수천 년의 침식 흔적을 남긴 주인공은 시공을 넘어 지금도 똑 같이 비를 내린다.
대도시 서울의 포장된 길바닥에도, 길가 텃밭의 꽃 무리에게도, 자동차로 가득 한 시내에서 가뿐 숨을 쉬는 가로수 나무에도, 그 한가운데를 바쁘게 지나가는 사람에게도, 생명수는 변함없이 또 차별 없이 뿌려진다. 그리고 기쁘고 고마운 심정으로 이 비를 생명수로 받아들이는 생명은 새로운 생명을 덤으로 받는다. 이 세상에 생명수가 필요 없는 생명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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