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없어진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의 오래된 극장에서 상영한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졌을 때 옆에 앉은 중년 백인 여성이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중국의 무협 영화를 보고 눈물을? 그것도 나이 든 백인 여자가?’ 순간 뜨악했다. 그러나 이내 감동이 공명됐다. 한바탕 무술 영화를 보고 난 뒤 난데 없이 가슴이 촉촉해지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지붕 위를 날아다니고 대나무 위에 서서 일합을 겨루는 장면에서도 잔잔한 북소리와 숲을 스치는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과장이라도 수준이 높으니 예술이 됐다.
거기에 가슴을 깊게 관통하는 애증의 아픔이 흐른다. 연인끼리, 스승과 제자 간에, 부모와 자식 그리고 미처 말하지 못한 애모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사랑과 안타까운 미움이 짙게 배어 있다.
와호장룡’이 첫 상영된 2000년만 해도 미국에서 이 무술 사극 영화를 개봉한 극장은 아주 드물었다. 캘리포니아 패사디나에 위치한 이 극장도 폐관 직전 싼 값에 영화를 올린 참이었다.
하지만 입소문을 타고 몇 개월 동안 롱런을 하면서 개봉관은 들불처럼 늘어났고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까지 차지했다.
'뭐 하느라 사랑도 털어놓지 못하고 살다 죽는단 말인가.’ 인생의 길에서 혼자 짊어진 외로움과 허탈, 말 못할 슬픔이 현란한 무술 뒤에서 관객의 동감을 일으킨 것이다.
한국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도 주인공 정원(한석규)은 끝내 ‘사랑한다’는 말을 다림(심은하)에게 선사하지 않는다. 시한부 삶을 살면서도 마음속에 꼭꼭 숨긴 사랑은 죽음과 함께 침묵에 잠긴다.
하지만 영화는 ‘크리스마스’라는 제목을 내걸었다. 성탄절 전날 정원이 죽었는지도 모르고 사진관에 들렀다가 진열장에서 자기 사진을 보고 돌아서는 다림의 환한 미소 덕분이다. 사랑이 배달된 것이다.
크리스마스는 생명과 죽음이 교차하는 정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지만 그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으로 절정에 이르는 까닭이다.8월의 여름에 만난 정원과 다림의 크리스마스는 사랑이 전달되며 그들의 가슴에 찾아 왔다.
대중에게는 ‘나니아 연대기’로 널리 알려진 C S 루이스는 ‘전시의 학문’이라는 강연에서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환경이 주는 세 가지 해악을 설명했다. 20세기 최고의 기독교인이라고 불리는 루이스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시절 전장에 나갈 젊은이들 앞에서 전쟁이 주는 정신적 폐해를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는 ‘흥분’, 둘째는 ‘좌절’, 셋째는 ‘두려움’이다.
전쟁 같은 일상을 사는 21세기 한국인을 장악하고 휘두르는 괴물들도 다름이 없다. 늘 달아올라 있고 수시로 낙담하면서 겁에 질려 이리 뛰고 저리 뛰도록 내몬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원작을 영화로 만든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의 마지막 장면은 뽀얀 포연으로 뒤덮인다. 사랑하는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만)를 억지로 떠나보낸 뒤 주인공 로버트 죠단(게리 쿠퍼)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홀로 남아 적군에게 최후의 총탄을 퍼붓는다.
마리아나 죠단이나 머뭇거리고 숨어서 애달픈 사랑을 즐길 여유가 없다. 오직 3일만이 둘에게 주어진 시간이었다.
영국의 17세기 시인이자 성직자인 존 던의 설교문이 이 작품의 모태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이를 알고저 사람을 보내지는 말지어다. 종은 바로 그대를 위하여 울리기에.’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미국과 캐나다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sy)은 한국의 추석에 견줄 수 있다. 미국에선 11월 마지막 목요일이 추수감사절이지만 캐나다에선 일찌감치 10월에 찾아온다. 더 추운 만큼 추수의 시기도 일찍 오기 때문일 것이다.
추수감사절은 감사의 마음으로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 보고, 한해를 마무리하는 정리에 들어가는 때이다. 크리스마스는 한 해의 끝자락을 설렘과 사랑으로 감싸 안으며 위로하고 치유하는 시즌이다. 모두 포근한 사랑과 감사가 주인공이다. 사랑은 전해질 때 비로소 가치가 있다. 그리고 널리 전염된다.
하늘을 찌를 듯 권세를 부리던 독재자도 순식간에 죽는다. 종은 바로 당신을 향해 울리니, 자신을 쓰다듬어주고 주변에 사랑을 보낼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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