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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어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혹해 진다. 다른 사람을 겨냥하던 화살이 갑자기 자신을 향하면 화들짝 놀란다. ‘정말 어떻게 해야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데 그럴 짬이 없다. 그런데 바로 이 순간 진정성이 터져 나온다. 둘러댈 변명이나 그럴 듯하게 치장할 명분을 찾을 틈이 없으니 진심이 나오고 본성이 드러난다. 사람의 가치가 순식간에 판명난다.
‘What would you do?’ 미국 ABC방송국이 금요일 저녁마다 방영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일종의 몰래 카메라 다. 미리 정한 각본대로 배우들이 엉뚱한 상황을 연출하고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숨겨진 카메라들이 촬영한다. 깔깔 웃게 만드는 내용도 있지만, 인간에게 사랑과 정의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여과 없이 보여줘 진한 감동을 주는 때가 많다.
텍사스 주 샌안토니오는 군인과 군속 그리고 가족 등 군 관련 인구가 미국에서도 가장 많은 곳으로 꼽힌다. 이곳의 한 마켓 계산대에서 젊은 남성이 물건을 올려놓는다. 그 중에는 아기가 먹을 이유식과 기저귀도 포함돼 있다. 남자는 군복 윗도리를 입고 있다. 아직도 이름과 계급장이 그대로 달려 있다. 한눈에 봐도 군대를 막 제대한 퇴역 군인이다.
몇 십 달러나 될까? 계산기에 지불할 금액이 뜨고 돈을 낼 차례다. 그러나 남자가 내민 카드는 잔액이 부족해 지불이 거부된다. 당황해서 어느 물건을 빼낼까 우왕좌왕 하는 남자를 계산대에 줄을 선 고객들이 바라본다. 퇴역군인은 아기를 먹일 돈도 부족하다. 당신이라면 어찌 하겠는가?
뒤에 서 있던 백인 할머니가 돈을 내 준다. “얼마가 부족해요? 내가 낼게요.” 라틴계 노동자 중년 남성도 아기 이유식은 사야한다며 가진 돈의 전부인 2달러를 점원에게 건넨다. 똑 같은 상황이 벌어질 때마다 할아버지도, 아저씨도, 아주머니도 돈을 낸다고 나선다.
낡은 모자를 쓴 흑인 할머니가 방점을 찍는다. “이거 3달러 중에서 남은 돈 50센트를 저분 계산으로 돌려줄래요?” 한눈에도 어렵게 사는 처지로 보인다. 고마워 어쩔 줄 몰라 하는 젊은이에게 할머니가 말한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내 안에 있다우. 하나님은 좋은 분이에요. 그분이 변화를 이뤄 줄 거예요.” 어느 보석보다도 더 빛나는 장면이 인간 세계에서 빚어진다.
또 다른 컷에서도 할머니가 남자의 뒤에 줄을 서 있다. 낙천적인 성격의 할머니는 계산대에 기대 남자와 점원의 이야기를 들으며 환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러다 차츰 표정이 굳어 간다. 남자가 돈이 없다는 대목에 이르자 할머니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종업원에게 건넨다. “이게 오늘 내가 해야 할 좋은 일이구만.” 남성이 ‘미안하다’고 하자 손을 젓는다. “걱정 말아요. 어서 계산해요.” 그리곤 악수를 하며 젊은 퇴역군인을 격려한다.
방송국이 이런 설정을 가지고 몰래 카메라를 찍는데는 그럴 만한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종일 촬영을 했는데 반응을 보인 사람이 별로 없다면 제작진에겐 낭패다. 여러 사람이 크고 작은 액수의 돈을 내겠다고 나설 것이라고 충분히 예상했기에 기획한 것이다.
‘다음 끼니를 채우려고 저희 식당 쓰레기를 뒤지시는 분에게. 당신은 인간입니다. 그리고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뒤지는 것보다 훨씬 소중한 사람입니다. 식당 영업시간 중 아무 때나 들어오세요. PB&J클래식 메뉴와 신선한 채소, 한 잔의 물을 무료로 드리겠습니다. 아무 질문도 하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친구. 식당 주인.’
오클라호마주에 있는 PB&J라는 식당 밖에 걸린 글이다. 생명의 존엄성이나 인권을 입으로 말하기는 아주 쉽지만 호주머니에 남아 있는 푼돈이라도 나누기는 어렵다. 홈리스에게 식당에서 남은 음식을 주는 것도 드문 판에 레스토랑 안으로 ‘거지’를 불러들이기는 몇 배 더 힘들다. 또 돈 내고 밥 먹는 손님들의 이해와 인식의 수준도 함께 맞아 들어가야 가능한 일이다.
PB&J 식당의 결단은 배 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거리를 나누는 한편 올바른 식량 수급 체제를 갖춰 지구의 환경 보호까지 추진하는 캠페인으로 확대됐다. ‘잘 먹는 세상’(A-Well-Fed-World)이 바로 이런 운동을 벌이는 비영리 단체다. ‘잘 먹는다’는 의미는 여기서 ‘굶는 사람들도 잘 먹는 세상’이 돼야 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의미는 ‘사람의 몸과 지구 환경 모두에 유익하게 잘 먹는 세상’을 뜻한다. 소, 돼지, 닭, 양 등 인간이 고기를 먹기 위해 희생되는 자연과 환경도 지키자는 것이다. 쉽게 말해 고기 섭취량을 줄이고 식물성 음식을 더 먹으면 좋은 지구 땅 위에서 배고픈 사람들까지 함께 잘 먹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식당이나 가정에서 버리는 음식을 생각하면 빨리 이해가 간다. ‘잘 먹는다’는 행위와 상태의 정의가 아직도 ‘기름 진 음식을 배 터지게 먹는 것’이라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이런 식습관은 본인에게도 치명적인 타격을 준다. 시간 차이일 뿐이지 언젠가는 몸 안에서 터질 시한폭탄을 열심히 제조하는 것 아닌가.
잘 먹는다는 정의도 이미 바뀌고 있다. 어떻게 하면 보다 깨끗한 친환경 음식을 구할 수 있을까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나 진정으로 잘 먹으려면 배 굶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 배가 고파 조그만 어린 아이들이 쓰러지고 병들어 죽어 가는데, 내 식구만 배불리 먹었다고 잘 먹는 건 아닐 것이다. 일부러 외면하고 신경을 끊으려고 해서 그렇지, 굶주려 죽는 어린이 사진 앞에서 기름진 고기를 굽고 친환경 채소로 쌈 싸 먹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다만 실천이 궁할뿐이다. 신문이나 방송에 소개되는 극소수의 미담도 소중하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 일상에서 소소하게 아끼고 나누는 행동도 진짜 ‘잘 먹는’ 길인 것 같다.
정석규 신양문화재단 명예이사장은 생전에 모교인 서울대에 450억 원을 기부했다. 공부하고 싶은 가난한 학생들에게 엄청난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난 5월 정 이사장이 별세하자 서울대는 교내 세 곳에 분양소를 차렸고 많은 학생들이 찾아와 이별을 슬퍼했다.
정 이사장은 서울대 출신으로 기업을 일궈 고무 산업계 1인자로 꼽힐 만큼 돈을 벌었지만 평생 검약하게 살았다. 중국집에 가면 짜장면과 우동 외에는 먹지 않았고 4000원짜리 칼국수가 그의 단골 메뉴였다고 한다. 심지어 짜장면을 먹다 남으면 플라스틱 그릇에 싸가지고 나갔다는 일화도 있을 정도다. 거부였지만 닳고 닳은 구두를 신고 다녔다. 김도연 전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은 언론을 통해 “정 이사장의 사무실에는 여기저기 뜯어진 낡은 소파와 책 밖에 없었다”고 회고했다.
그의 별세 소식을 들은 후학들은 추모의 글을 인터넷에 올렸다. '당신께서 만들어주신 계단 덕분에 현재 저의 꿈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사장님이 살아오신 삶이 많은 이들에게 힘이 됐음을 새삼 느낍니다. 베풀 줄 아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이우일 서울대 연구부총장은 "돈은 분뇨 같아서 한곳에 모아두면 악취가 나지만 밭에 풍성하게 뿌리면 고루 수확한다는 것을 평생 신조로 사신 분"이라고 말했다.
돈이 많아지면 멋있게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것 같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가진 돈의 단위가 커질수록 나눔도 더 어려워지기 십상이다. 욕심도 그 만큼 커지기 마련이고, 나눠야 할 액수도 커지기 때문이다. 돈을 조금 벌 때는 십일조를 잘 내다가도 수입이 많아지면 이십일조, 삼십일조로 비율이 뚝뚝 떨어진다. 부자가 돈 내놓기가 어렵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부자가 천국에 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가는 것만큼 어렵다’고 비유했나 보다. 문제는 돈을 푸는 게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조항이라는 점이다. 아무리 힘든 바늘구멍이라도 일단은 무조건 통과해야 하기 때문이다. 천국이 있다면 어찌 됐든 가야하지 않겠는가.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생할 수는 없으니까.
천국이 아예 존재하지 않으면 그만이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천국이 없다는 증거도 없으니 더 곤란하다. 확률이 반반이라고만 해도 포기하는 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 될 듯하다. 확실하지 않으니 일단 숟가락이라도 걸어 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살아가면서 더 자주 하늘을 우러러 보고 이웃을 살펴봐야겠다. 살아서는 ‘잘 먹고’ 죽어서는 ‘천국 가는’ 여정을 나눔을 통해 얻을 수 있다. 나눔이라는 패키지여행에 ‘제대로 먹고 살다 불멸의 생명으로 가는 항공권’이 포함돼 있는 것을 새삼 발견한다. 다행(?)인 것은 아직 바늘구멍은커녕 아주 큰 문이 열려 있다는 점이랄까. 혹시라도 돈 많이 벌기 전에 나눔의 티켓을 많이 쌓아 놓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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