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맺어 주는 인연이란 어떤 모양일까. 그리고 얼마나 오랜 동안 지속되는 것일까. 만남과 떠남의 구비구비에서 빚어지는 사연과 소명의 결실은 무슨 색깔을 띠는가.
성경은 ‘떠남’을 순종의 큰 과정으로 소개한다.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수백년 간 터를 잡았던 이집트를 떠나 광야로 나섰고 아브라함은 풍요를 누리던 갈대아 우르 지역을 떠나 알 수 없는 땅 가나안으로 향했다. 예수의 발걸음 역시 끝없는 떠남의 연속이었으며 바울과 제자들의 뒤따름 역시 다름이 없었다.
스티브 린튼 박사도 계속 떠난다. 그리고 그의 발걸음은 언제나 북한에서 멎는다. 많을 때는 1년에 다섯 번, 적어도 두 번 이상 북한을 방문한다.
지난 95년 북한은 가뭄과 수해로 극심한 식량난을 겪고 있었다. 린튼 박사가 처음 북한에 들어 가 구호물품을 전한 때였다. 그리고 린튼 박사의 외증조부 유진 벨 목사의 한국 선교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린튼 박사의 선대는 대대로 한국과 질긴 인연을 맺어 왔다. 유진 벨 선교사는 목포 양동교회를 비롯해 20여 개의 교회를 세웠고 목포 정명여중, 영흥학교, 광주 숭일학교와 수피아여고를 세운 장본인이다.
그 와중에 아내 로티 벨은 6년만에 병을 얻어 한국 땅에 뼈를 묻었고 아들 한 명도 숨졌다. 딸 샤롯 벨은 성장한 뒤 선교사로 군산항에 발을 디딘 윌리엄 린튼 목사와 결혼했다. 신사참배를 거부해 강제로 출국 당했던 윌리엄 린튼 부부는 해방 후 다시 돌아 가 오늘의 한남대 전신인 대전대학을 세우기도 했다.
그들의 셋째 아들 휴 린튼은 미군 해군장교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후 53년 순천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아내 로이스 린튼과 전라도 도서지방 및 오지를 찾아 다니며 한국노회와 함께 2백개 교회를 개척했다.
간척지를 개간하고 순천 결핵진료소와 요양원을 세운 휴 린튼은 84년 요양원 앞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부인 로이스 역시 은퇴할 때까지 한국의 결핵환자들과 동거동락 했다.
이들의 아들이 스티브 린튼 박사다. 그는 순천에서 태어나 대학교까지 한국에서 마친 토박이다. 지금도 그의 한국어 억양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배어 나온다.
100년을 넘어 4대에 걸친 한국과의 인연이 이제 북한 땅에서 꽃을 피우고 있다. 지난 95년 4대손인 린튼 박사가 외증조부 이름을 딴 유진벨선교회를 세우고 결핵 퇴치 사업에 나선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 등 국제보건단체들은 북한을 결핵 사망률 1위 국가로 꼽고 있다. 본국 통일연구원의 99년 ‘북한인권백서’도 북한 내 3백만에서 4백만 명에 이르는 결핵환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했다.
매년 몇 번씩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린튼박사는 결핵 진단과 치료에 필요한 각종 약품과 기구를 전달한다. 결핵의 조기 발견을 위한 X-레이와 필름, X-레이 검진차량, 수술실 장비와 의료기구, 치료에 필요한 각종 의약품 등을 북한 전역의 46개 병원과 요양소에 보급하고 있다. 유진벨선교회를 통해 X-레이 검진차량 17대와 의료용차량 19대가 북한 곳곳을 누비고 있다.
결핵치료에 필수적인 영양 보급을 위해 경운기, 온실 장비, 씨앗종자, 살충제 등 농업용품도 지원한다. 유진벨선교회가 찾아가는 요양소마다 채소를 키우고 토끼 등 가축을 기르게 된 연유다.
유진벨선교회의 북한 결핵 퇴치사업에는 분명한 원칙 몇 가지가 있다. 린튼 박사 등이 병원이나 요양원을 직접 찾아가 전달하고 후원자의 정체를 분명히 밝힌다. 지원 물품과 함께 기증자 명단도 전달한다. 또 소모품과 부품 등을 보급하며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간섭자’가 아닌 ‘손님’의 자세를 잊지 않는다.
물품을 전해주면서 꼬치꼬치 기증자의 신원을 설명해주는 린튼 박사의 태도에 처음엔 어색해 하던 북한 사람들도 이제는 호감을 표시한다. “통일이 되면 만나자고 전해주십시오.” “열심히 결핵을 퇴치하겠다고 전해주시라요.” 지난달 평북지방과 평양을 방문한 린튼 박사는 “지방 공무원과 보건요원의 협조가 눈에 띠게 좋아졌다”고 반가워했다. 이제는 북한 보건성 직원 4명으로 ‘유진벨 협력팀’까지 구성될 정도다.
4대를 이어 가며 피보다 짙은 복음의 정을 한국인과 나누는 ‘린튼네 사람들’. 널리 알려지고 유명하지는 않아도 하나님이 이들과 한국인 사이에 맺어 놓은 인연의 끈은 질기고 따뜻하다. 그리고 크리스천은 무엇을 하며 사는 사람들인지,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몸으로 실천하며 109년째 보여 주고 있다.
2004/01/27
미주 중앙일보 유정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