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미대사관 근무 이근식 장로 '믿음 오딧세이'
사람이 사는 길은 인구 수 만큼이나 복잡하고 다양하다. 믿음의 여정이나 수준도 헤아릴 수 없이 가지각색이다. 그래서 겉으론 삶의 방식이나 신앙의 알맹이가 보이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니 당장 잘 나간다고 마냥 축복이라면 종교는 초라해진다.
이근식 장로의 가정은 신앙을 가지고 사는 게 무언지 생각게 한다. 한 평범한 가족이 20여 년에 걸쳐 세상을 헤매고 살면서 버티는 힘은 무엇이고 열매는 무슨 맛인지, 말 그대로 화두를 던진다. 믿음을 갖고 산다는 건 어떤 모양인지 말 없이 보여 준다.
이 장로는 지금 이집트에 산다. 선교사가 아니다. 카이로 주재 미국대사관에 근무하는 국무부 소속 외교관이다. 그는 부인 이기한 씨와 사이에 2녀1남을 두었다.
첫째인 딸 수지는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올 봄에 하버드대학교 로스쿨을 졸업했다. 변호사 자격을 따기 위해 남가주에서 실습 과정을 밟고 있다.
토비는 둘째 딸이다.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인류문화학을 배운 뒤 영국으로 옮겨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석사 학위를 올해 받았다. 하버드대학교는 토비에게 풀 스칼라십을 주며 기꺼이 박사과정의 문을 열어 주었다.
막내 잔은 막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두 누나의 뒤를 이어 콜럼비아대학교에 진학한다. 지난달에는 백악관을 방문했다. 올해의 고교 졸업생 중 대통령 장학금 대상자 141명에 포함돼 초청을 받은 것이다. 카이로에서 미국인학교를 다닌 잔은 해외 출신 대통령 장학금 수혜자 두 명 중 한 명이다.
휴가를 받아 LA에서 다시 뭉친 온 가족은 졸업식에 참석하랴, 백악관에 가랴, 동부와 서부를 분주히 오가야 했다.
언뜻 화려하기 그지 없어 보인다. 이민 가정의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것이다.
이 장로는 한국정부가 세워진 해에 태어났으니 그의 나이도 50 고개 중간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국무부 공무원이 된 것은 이제 4년 됐다. 당연히 쉰 살이 넘어 미국 외교관이 된 것이다.
결혼한 직후 지난 77년 하와이 일식당 주방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이게 아니다’ 싶어 미군에 입대한 게 6개월이 지난 때였다. 그 후 이 장로 가정의 삶은 한국, 미국, 독일, 벨기에, 미얀마 등을 오가는 ‘떠나는 인생’의 연속이었다.
언제 아이들 학원에 보낼 틈이 있었으며 자식 셋을 세계 최고 사립대학에서 공부시킬 돈은 또 어느새 모았겠는가. 아무리 미군이라지만 군인 부사관 월급이 뻔하다. 이삿짐을 꾸려 온 세상을 떠돌며 사는 게 자녀 교육에 무슨 영향을 줄지 아슬아슬하다.
미국에서도 학원에 보내지 않으면 불안하고 아이들 마음 흔들릴까 조금 떨어진 동네로 이사도 망설이는 게 한인사회 아니던가.
그러나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나님의 인도와 보호를 믿었다. 그래서 미련과 욕심을 떨치고 떠날 수 있었다.
처음 한국에 근무할 때 이 장로는 정보부대에 발령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끗발을 날리는 자리였다. 군대 내에서도 혜택이 많았다. 그러나 밤이면 룸 살롱을 돌며 사람들을 만나야 했다. 자진해서 임무 변경을 요청했다. 흔한 ‘블랙마켓’ 한 번 하지 않았다. PX에서 미군 물품을 가지고 나와 팔면 돈을 버는 때였다.
6년 후 미국으로 돌아 오자 친척들은 비즈니스를 하며 자리를 잡으라고 입을 모았다. “이 다음에 어떻게 애들 대학 보내려고 그러느냐”고 말렸지만 독일로 갔다. 그 동안 근근이 배운 컴퓨터 기술 관련 보직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자녀들과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돈 보다는 언제나 시간이 더 소중했다.
그리고 임지 마다 교회를 섬기고 교회가 없으면 세웠다. 독일 브레맨한민장로교회도 하노버에 있는 목사를 청빙해 개척한 것이다. 벨기에 나토(NATO)사령부에서 일할 때도 교회를 세웠다. 아예 사령부 내 채플의 열쇠를 받아 매일 새벽 기도를 빼놓지 않았다.
이 장로 가족은 ‘가정예배’의 중요성을 입이 닳도록 강조한다. 아버지가 인도하는 가정예배는 세계 어디를 가나 가족을 하나님 안에서 하나로 묶는 세상에서 가장 강한 동아줄이었다.
가정의 모든 환난과 어려움을 해결받는 통로였고 이민생활을 이끄는 불기둥이요 구름이었다. 자녀들이 ‘지혜와 명철’을 공급받는 시간이었다. 하루라도 성경 읽기를 넘기면 저녁 마다 어머니의 조용한 지적이 따랐다.
자녀들은 가정예배를 통해 ‘기도하면 된다’는 단순하지만 고귀한 진리를 체험했다. 크리스천으로써 세상을 사는 데 필요한 게 무언지 스스로 하나씩 깨달아 가는 길이 가정예배였던 것이다.
큰 딸 수지는 LA 시민단체서 매춘부, 가정부 등으로 억압받는 불법 이민자들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있다.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 얼마든지 근사한 로펌에서 실습할 수 있지만 돈 한푼 못받는 자리를 택했다.
둘째 토비의 전공은 성경이 쓰여진 고대 그리스어다. 옥스포드에서 전공했고 하버드에서도 박사 학위 과목이 그리스어다. 막내 잔은 성경을 여섯 번이나 읽었다. 운전을 배우며 하도 양보를 많이 해 주의( )를 받을 정도로 착하다.
이들 가족이 가정예배를 드릴 때 공용어는 한국어다. 자녀 모두 2세이지만 통성 기도를 한국어로 유창하게 한다. 물론 한글 성경을 읽는다. 가족끼리 말이 통하지 않는데 사랑과 신앙이 온전할 리 없다는 부모의 믿음 덕분이다.
‘기도해 주세요’ 아이들은 수시로 전화해 일상사를 털어놓고 부모의 기도를 부탁한다. 수지가 시민단체를 선택했을 때 부모는 못내 아쉬워했다. “아빠, 엄마, 이제껏 남을 위해 살라고 해 놓고 무슨 말씀이에요” 이 한마디에 부모의 마음은 기쁨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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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2004/07/08 14:51
미주 중앙일보 유정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