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에서 태평양을 따라 북향으로 달리다보면 산타바바라를 만난다. 남가주의 북단 끝이다. 하지만 산타바바라는 이국적이다. 분명 남가주의 태양이 작열하고 있지만 공기와 땅 그리고 기온마저 확연히 다른 정취를 품고 있다. LA 일대가 햇빛에 이글거릴 때도 산타바바라는 살갗을 간질이는 시원한 바람을 불어준다. 눈이 시리도록 뜨거운 백사장과 여름 태양이 부딪혀 반짝이는 태평양도 산타바바라에서는 온화하고 정숙하고 푸르다.
산타바바라를 갈 때마다 다운타운을 지나치지 못한다. 산타바바라의 다운타운은 프리웨이와 이어지지 않는다. 따로 입구가 마련돼 있지 않다. 초행자에게는 불친절한 환영이다. 그러나 그 덕분에 안락하고 조용하다.
그렇다고 헤맬 염려는 없다. 101번 프리웨이를 달리다 산타바바라에 들어서면 다운타운 사인이 나온다. 그때부터 서너 개 출구에서 아무 때나 내리면 된다. 그리고 프리웨이와 나란히 가면서 스테이트 스트리트(State Street)를 만나면 된다. 빠르면 이삼 분 안에, 늦으면 십여 분 안에 스테이트 스트리트와 조우할 것이다. 늦게 만나는 것도 좋다. 그 와중에 산타바바라 언저리 골목을 천천히 관람하시라.
스테이트 스트리트는 몇 십 년이 지나도 변함이 없어 보인다. 넓지 않은 길에 양옆으로 늘어선 상가들, 느릿느릿 거리를 즐기는 행인들, 레스토랑과 커피숍 그리고 극장, 모두 그대로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지만 미국의 도시들은 어쩐지 늙지를 않는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변화의 흔적이 여기저기 눈에 띤다. 무차별로 옛 건물을 헐고 새로 짓는 만행은 거부하고 있지만 상점의 간판은 세상의 흐름을 타고 새 얼굴로 바뀌었다. 우아한 드레스며 모자와 장식품을 내걸던 쇼윈도우는 사라져 가고 디지털 상품점이 번식한다. 얼음에 노랑, 빨강, 각가지 과일향 소스를 뿌려주던 작은 빙수 가게는 아련한 추억 속으로 자리를 옮겼다. 대신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가게와 얼음을 갈아 넣은 슬러시 커피를 파는 대형 체인점들이 터를 잡았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슬렁거리며 상점을 기웃거리고, 카페 발코니에 앉아 선글라스 너머로 거리를 구경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산타바바라 다운타운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아날로그 세계의 여유와 느림을 가득 선사한다.
더구나 스테이트 스트리트를 조금만 벗어나면 네이티브 주민들이 안식을 줄기는 커피숍과 소박한 카페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커피나 탄산주스를 주문하고 사진이 가득 담긴 아무 책이나 가져가 시간을 죽여 보라. 그저 조용히 숨만 쉬고 있어도 낯선 고장이 주는 설렘과 평안이 시름을 잊게 한다.
호기심을 충전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자동차를 몰아 다운타운 뒤편의 언덕을 오르면 된다. 태평양을 굽어보는 아름다운 주택가 사이로 굽이굽이 길이 나 있다. 그 사이로 교회며 학교가 자리 잡고 있고 그림 같은 커피숍과 마주칠 수도 있다. 유럽 영화를 상영하는 커뮤니티홀을 만나는 행운이 깃들면 귀가 시간을 늦추더라도 차에서 내리고 볼 일이다. 오래도록 어쩌면 죽는 시간에 떠오를 포근한 기억을 얻게 될 것이다.
다운타운의 스테이트 스트리트를 곧장 내려가 바다로 향하면 그대로 피어를 찾을 수 있다. 커다란 주차장을 갖춘 피어는 레스토랑과 선물점을 찾는 관광객들로 분주하다. 피어를 정면으로 보면서 오른쪽으로 언덕길을 달리면 왼편으로 또 다른 입구가 나온다. 여기에는 산타바바라 피쉬마켓(Fish Market)이 있다. 가게 앞 식탁에 앉아 생선 요리를 즐길 수 있다. 물론 레스토랑보다 돈을 덜 쓰고 바다 내음까지 만끽할 수 있다.
가던 길을 조금 더 달리면 태평양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드넓은 잔디밭이 펼쳐진다. 캘리포니아에서 알아주는 연 날리는 명소 중의 하나다. 짙푸른 바다와 청명한 하늘, 그리고 그 사이를 나는 연을 바라보다 잔디 위에 누우면 우주가 돌아가는 순서가 새삼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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