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삐용’은 포주를 죽이지 않았다. 교육자인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채 사창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건달이었지만 사람의 목숨을 뺏은 적은 없다. 재판에서 무기징역형을 받았지만 사실 무죄였다. 야심과 오만으로 가득 찬 법정은 스물다섯 살 청년의 진실과 인생에는 애당초 관심도 없었다.
TV채널을 돌리다 깨진 안경을 쓰고 화면을 가득 채운 더스틴 호프만의 얼굴과 마주쳤다. 잠시 뒤에는 예리한 눈매에 호기심이 가득한 스티브 매퀸이 나타났다. 참 오랜만에 영화 ‘빠삐용’을 만났다.
‘빠삐용’의 줄거리는 실화다. 앙리 샤리에르라는 프랑스 청년의 이야기다. 나비 문신 때문에 ‘빠삐용’이라고 불린 앙리는 13년에 걸쳐 여덟 번의 탈옥을 감행한다. 덕분에 빛도 없는 상자 같은 독방에서 2년과 5년씩 두 차례나 지옥을 경험했다.
결국 ‘빠삐용’은 엄청난 물살과 파도, 상어가 우글대는 남미의 프랑스령 ‘악마의 섬(디불로)’에서 탈출에 성공한다. 누구도 탈옥할 수 없다는 섬에서 코코넛을 넣은 자루로 뗏목을 만들어 자유를 찾은 것이다.
앙리는 1944년 베네수엘라에 정착했다. 그리고 1968년 ‘빠삐용’을 썼다.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이 소설은 1973년 영화로 제작됐고 ‘빠삐용’은 다시 한 번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바로 그해 앙리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영화에는 ‘빠삐용’이 독방에 갇혀 사경을 헤매다 환상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재판정에 선 ‘빠삐용’에게 유죄가 선고된다. 반발하는 그에게 판사가 일갈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다.” 순간 얼어붙은 ‘빠삐용’은 순순히 죄를 시인한다. 그는 아름다운 젊은 시간을 방탕하게 보냈다.
지난 30년 동안 서울에서 두 차례, 캘리포니아 남가주에서 세 번째 그리고 시애틀과 샌프란시스코, 워싱턴DC에서 살았다. 무슨 용기로 낯선 도시들을 오갔는지 모르겠지만 그때마다 이동해야 할 이유는 뚜렷했다. 때로는 가슴 깊이 울리는 목소리를 무작정 따른 적도 있다. 떠나야만 한다는 생각에 무슨 임무라도 수행하는 것처럼 짐을 꾸린 때도 있었다. 돌이켜 보면 그 순간, 그 도시에서 인생길에 뜻 깊은 일들이 이뤄졌다. 그리고 그때그때 건진 것들이 있다.
어떤 이는 “재미있었겠다”며 경탄의 눈빛을 보내기도 한다. 하지만 21세기 유목민의 삶에 대가가 없을 리 없다. 모든 인생에는 ‘원 투’가 있다. 장단(長短)이 공존하고 고저(高低)가 섞인다. 분명한 건 이삿짐을 싸들고 태평양을 오가고 북미 대륙을 횡단하는 사이 세월이 지난 것이다.
시간은 공평하게 흐른다. 한 도시에 뿌리를 박고 떠돌지 않은 사람에게도 화살처럼 지나갔을 것이다. 간혹 지루한 때도 있었겠지만 뒤 돌아 보면 다 아까운 시간일 터이다. 시간을 향한 미련과 아쉬움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이다. 아무리 후회 없이 살았다는 사람도 생명과 젊음의 한계 속에서 반짝이는 추억의 아련함을 피할 수는 없다.
지금도 샌프란시스코에서 산호제이를 잇는 프리웨이 280번의 57마일 구간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설렌다. 아스팔트로 포장된 고속도로인데도 살아 숨 쉬는 연인 같다. 하늘에서 쏟아지다 온통 길 위에 흩어져 반짝이는 햇빛, 하프문 베이를 향하는 92번 하이웨이를 만날 즈음 나타나 도로를 함께 달리는 숲과 호수, 주중 오후 환하게 뚫린 8차선 프리웨이를 운전하다보면 평화와 안식이 가슴을 채우기도 했다.
실리콘 밸리로 불리는 디지털 과학과 기술이 집중된 지역이지만 주택가에 접어들면 첨단은 보이지 않고 아날로그 시대의 느슨함이 넘친다. 아련한 정적과 집마다 핀 꽃들이 긴장감을 녹이고 사람을 나른하게 만든다. 뜨거운 태양 아래서 고요하게 누워 있는 캘리포니아의 동네를 지나노라면 종종 영화 ‘백 투더 퓨처(Back to the Future)’가 떠오른다. 괴상한 발명가 에메트 브라운 박사가 스포츠카를 개조해 만든 타임머신이 동네 다운타운 앞길을 달리는 장면 과 괜한 연상 작용을 일으키는 탓이다.
‘미래를 향해 과거로 돌아간다’는 영화 제목은 언제나 사랑스럽다. 곱씹을 의미가 담겨져 더욱 친근하다. 때로는 혼자 앉아 과거를 곰곰이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앞길을 제대로 가는데 꼭 필요한 과정이다. 개인도, 조직도, 국가도 마찬가지다. 지나 온 발걸음의 방향도 다시 조정하고 더러운 게 묻었으면 지금이라도 깨끗하게 닦아내야 한다. 시간의 물결을 타고 제대로 항해를 즐길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백 투더 퓨처’가 해피엔딩으로 환한 웃음을 짓게 했다면 ‘박하사탕’은 입가를 무겁게 한다. 영화 ‘박하사탕’하면 우선 떠올리는 장면이 있다. 배우 설경구가 달려오는 기차를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나 돌아갈래‘하고 외치며 자살하는 모습이다. 지나온 삶의 시간을 돌이키고 싶은 주인공이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 차 외치는 마지막 절규다. 많든 적든 누구나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 그 마음의 밑바닥에는 좀 낫게 살아보고픈 내일의 소망이 담겨 있다. 다시 고쳐서라도 잘 해보고 싶은 것이다.
빛도 없는 독방에서 벌레를 잡아먹으며 ‘빠삐용’을 버티게 한 힘은 복수였다. 무죄인줄 뻔히 알면서도 유죄를 주장한 검사와 사실 여부에는 관심도 없는 판사와 변호사, 탐욕 덩어리들의 유희장이 된 어긋난 사법체제에 대한 증오에 삶을 기댔다.
어느 날 ‘빠삐용’ 앞에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빛이 나타났다. 잠시 후 빛은 부드러워졌고 하나님의 음성이 가슴을 울렸다.
"오, 하나님, 이제야 저를 찾아 주셨군요. 그런데 무력한 당신의 아들은 지금 너무도 슬프고 억울합니다. 제게 왜 이토록 가혹한 시련을 주시는 겁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맹세컨대, 주님 저는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가련한 아들아, 너의 죄를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구나. 인생을 낭비한 죄, 너는 그토록 소중한 네 젊음을 방탕하고 헛되게 흘려보냈다. 사랑과 용서를 위해 마련된 시간들을 분노와 미움으로 가득 채웠다. 자, 눈을 뜨고 봐라. 그러므로 네가 지은 죄는 그 무엇보다 무거운 것이다."
시간을 낭비한 죄는 게으른 자에게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정신없이 바쁜 인생도 시간의 파도에 휘말려 떠내려가기는 다름이 없다. 자기 멋대로 시간을 쓰기는 똑 같기 때문이다. 바다에서 배가 나아가려면 조류와 풍향, 날씨와 방향을 수시로 파악해야 한다. 시간이라는 대양 위를 항해하는 인생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시작과 끝 그리고 중간 과정을 매일 묻고 또 묻고 답장을 받아야 한다. 오늘의 좌표를 확인하고 지나 온 궤적에 비추어 진행할 항로를 바로잡아야 한다. 가만히 있는 거나 묻지 않고 달리는 거나 쓸모 없기는 매 한가지다.
앙리는 교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세례도 받은 적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간절하게 찾는 목소리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그리고 이렇게 책에 썼다. “바람 속에서, 바다 속에서, 햇빛 속에서, 관목숲 속에서, 별들 속에서, 인간이 목숨을 연명할 수 있도록 바다에 뿌려 놓은 듯한 물고기에서까지도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나 온 시간의 가치는 열매로 계산된다. 열매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런저런 종류로 무수한 열매가 열려야 한다. 가장 훌륭한 열매는 많은 사람들이 먹고 힘을 내는 열매다. 농익은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고 누구나 먹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나의 시간은 비싼 값을 갖게 된다.
이 세상 떠날 때 상종가를 치는 인생이 진짜 성공한 삶이다. 재산도, 한 때의 지위도, 지식과 명예도 소용없다. 마지막 계산서에서 내 인생의 시간이 얼마나 값을 받을지 긴장해야 한다. 내 열매를 먹고 생명을 되찾은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늘 신경 써야 한다. 인생을 낭비한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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