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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진흙탕 건너 '나에게 열리는 문'

Views 863 Votes 0 2020.02.27 17:03:07
기생충3.jpg


가까이 다가 온 그 신사를 보니 한눈에도 ‘부티’가 물씬 풍겼다. 금발 머리를 단정하게 빚고 양복 정장을 세련되게 차려입은 멋쟁이였다. 외투도 입지 않고 나온 걸 보니 근처에 가는 참이었나보다.
토론토 다운타운에 자리잡은 로저스센터는 인적이 드물었다. 류현진 선수가 소속한 프로야구팀 ‘블루제이스’의 홈구장이다.
로저스센터는 고층전망대 CN타워와 아쿠아리엄 수족관과 함께 같은 지하 주차장을 사용한다.
11월 한가한 시즌이라 주차장도 자리가 남아돌았다. 두어 시간 뒤 주차장으로 돌아왔다. 아까 나왔던 주차장 문을 열고 들어가려는데 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큰일 났다. 문이 잠겼구나!” “주차 빌딩에 들어가는 입구가 한 군데만 열려 있나 보다. 그게 어딘가 찾아야 하는데ⵈ”
마침 저만치 길 건너 고층빌딩에서 한 사람이 나오더니 이쪽으로 육교를 건너 오는 게 보였다.
잠깐 망설이고 있는 사이에 서로 눈이 마주쳐 버렸다. “뭐를 도와 드릴까요?” 신사가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차를 세우고 이 문으로 나왔는데 잠겨 버렸어요. 주차장으로 들어가려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가 잠시 머리를 갸우뚱 하는 듯 하더니 말했다. “그문으로 내려가면 됩니다.” “그런데 저 문이 잠겨있어요.” “확실한가요? 그럴리 없는데ⵈ” “몇번 열어 봤는데 안 됩니다.”
그가 문으로 걸어가더니 손잡이를 잡아 당겨 보았다. “참, 안 된다니까 그러네ⵈ” 속으로 혀를 차려는 순간 문이 활짝 열렸다.
남자는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친절하게 문을 연 채 기다려 주었다. 몇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계단을 내려오면서 얼굴이 화끈 거렸다.
“조금만 더 세게, 한 번만 더, 문을 당겼더라면ⵈ” 너무 쉽게 포기한 것이다. 주차장 빌딩의 육중한 문의 무게를 몰라보고 잠긴 것으로 지레 짐작한 것이다.
겨울이 긴 도시니 문도 두껍고, 가뜩이나 바람까지 불어 문이 꼭 닫혀 있었다.
짧은 생각과 모자란 끈기가 빚은 부끄러운 코미디였다. 내 머리는 내 여정을 맡기기에는 너무 가볍다.
왜 쓸데없는 머리는 그다지도 빨리 도는지. 한 박자 천천히 생각해 보고, 한번 더 시도해 보질 못한다.
영화 ‘기생충’에 배우 송강호와 이선균이 인디언 추장 분장을 하고 나온다. 부잣집 어린 아들의 생일 파티에서 깜짝 이벤트를 선보이려는 것이다.
그러나 자리는 곧 피투성이 난장판이 된다. 먼 나라, 먼 시간에서 끌어 당긴 장난이 오늘 엉뚱한 곳에서 참혹한 현실로 바뀐다.
웃자고 한 게 비극으로 끝난다. 예측할 수가 없다. 내일 일을 알 수 있다면 그건 인간도 아니고 그런 인생은 아예 없다.   
이십여 년 전 한인 대학생이 미국 중서부 인디언 보호구역으로 단기선교를 갔단다. 그곳 마을에서 놀랍게도 한인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50년대 주한 미군이던 인디언 남편을 만나 미국으로 와서 보호구역에서 살게 됐다. 몇 년 뒤 남편이 죽은 뒤에도 수십 년째 인디언 보호구역에 머물며 평생을 보내는 중이었다.
인디언 보호구역에서는 알코홀과 마약에 찌들어 있는 원주민이 적지 않다. 영화에 나오는 서부 대자연의 호기와는 많이 다른 실상이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보조금을 받으며 세상과 동떨어진 보호구역에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누구 탓이냐를 따지기 이전에 인생을 꾸려 갈 동기 자체가 부족하다.
‘왜 여기 이렇게 있느냐? 얼마든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젊은 학생의  권고에도 그녀는 움직이지 못했다고 한다.
보이지 않는 울타리 밖으로 나올 엄두를 내기 쉽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새 익숙해진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하고, 보호구역 바깥 세계는 두려운 미지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한 기쁨을 준다고 해도 술과 섹스와 야망에만 집착하는 냉담한 피조물들입니다.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자고 말해도 그게 무슨 뜻인지 상상하지 못해서 그저 빈민가 한구석에서 진흙 파이나 만들며 놀고 싶어 하는 철없는 아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만족합니다.’
C.S. 루이스가 ‘영광의 무게’에 쓴 구절은 인생의 ‘소탐대실’(小貪大失)을 지적한다. 하나님이 준비한 크고 좋은 것을 모르고, 작고 추잡한 만족감에 귀한 인생의 시간을 소진한다는 비유다.
허무한 것에 연연하며 목숨 걸고 살면서, 중요하고 귀중한 것을 잃는다. 인생에는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있다.
반드시 열어야 할 문들이 있다. 한두 번 당겨서 안 열린다고, 돌아서면 안되는 문들이 있다.
시간은 바람처럼 스쳐간다. 소중한 문일수록 무겁다. 하지만 문의 주인은 쉽게 문을 연다.
내 문을 찾아 두들기면 주인이 열어준다. 인생의 문이 가진 특성이다.
남의 문은 아무리 두드려도 시간 낭비고 힘만 빠진다. 그래서 문의 주인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내 문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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